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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2018-12-23 21:48:59, Hit : 228)
<성경의 맥락> 콜로라도 스프링스 한인성당 성경강의

<대림 제3주간 목요일>

<성경의 맥락>

오늘 본당신부님께서 저에게 주신 주제는 <성경>입니다. 다른 것도 없습니다. 그냥 무심하게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하라. 그것도 30분 동안 이야기하라. 하셨습니다. 이 방대하기 이를 데 없는 기원전 400년부터 시작하여 기원후 200년까지 그 집필이 이어졌고, 그 필진에 에 대하여도 정확히 추정할 수가 없어서, 신학대전을 기록한 대신학자마저도 성경을 통하여, 신의 부재를 우리는 증명할 수 없다라고 결론지었던 이런 광대한 주제를 놓고 30분 동안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일단 우리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이야기하는가?입니다. 왜 우리는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 21세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식, 성경을 필사 배끼고 앉아 있는가? 그것이 도대체 우리 삶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이런 질문입니다. 답을 찾아가 보지요. 여기 모여있는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무엇입니까? 신앙인은 의미를 찾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 속에서도 신의 함께 하심이라는 의미에 천착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오늘도 삶의 의미를 질문하는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신의 문제를 외면하지 못한다. 인생이라는 것이 그저 저 혼자 잘나 성공하고 출세하고 그렇고 그렇게 살다가 어느날 가버리는 사람이라면 굳이 신, 신앙은 필요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신앙인들은 그 모든 것, 우리들 인생안에서 벌어지는 대단히 다양한 주제들이 나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를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부터 주어지는 것, 성공, 행복, 사랑... 이 모든 것들이 베풀어졌다는 관점에서의 저마다의 인생을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는 일종의 무상성(無償性)에 대한 체험이지요. 우리는 생명 앞에서 이런 무상성을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 앞에서 이런 무상성을 느낍니다. 내가 짜달시리 뭘 대단히 잘해서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니거든요.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이런 모양새로, 이런 꼴로 날 것임을 선택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내 나이 6,70이 되었을 때, 미국에서도 이름도 낯선 콜로라도 어디쯤에서 이렇게 성경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앉아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저 또한 이 날 이 때까지 살아 여러분들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하리라고는 적어도 제가 날 때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무상성이라는 것이지요. 그저 주어졌다는 겁니다. 내가 산다고 살아왔지만, 평생이 내 것인줄 알고 내 뜻대로 내 맘대로 다 하고 산 것 같지만, 막상 돌아보니 모든 것이 주어졌던 것이요, 내게 주어진 것을 내가 감당하고 살았던 것 뿐이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는 인간의 삶에 주어져 있는 근본적인 허무, 곧 무의미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더라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쓰려는 목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삶에 뿌리 깊은 무의미를 극복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무의미와 그리고 궁극적 허무와 싸웁니다. 이런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인간은 배우고, 창의력을 동원하여 일하고, 사랑하는 것이고, 그런 노력들 안에서 인류역사는 존속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기 삶 안에 거듭되는 부정적 체험에도 불구하고 새로 출발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는 것이고, 그러기에 인간은 거듭되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지니고 삽니다. 이것이 저는 지금도 우리가 신앙인이고자 하는 두 번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무상성...에서 다시 시작하지요.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무상으로 베푸신 하느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구약을 볼까요? 구약의 출발은 대단히 아이러니하게도 바빌론 유배 이후에 시작합니다. 583년 유대는 바빌론에 의하여 완전히, 그야말로 돌 하나도 돌 위에 얹혀져 있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말끔하게 멸망당합니다. 유대 이스라엘을 떠나 하루 아침에 남의 나라 땅에 끌려가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왜 우리에게 이런 고통이 들이닥쳤나...를 추궁하게 되지요. 자신들이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들이 누구였고, 또 누구로부터 떠나왔는지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들이 손에 들고 있는 토라, 모세오경의 출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 하느님을 만났던 첫 번째 사건은 바로 탈출이라는 사건이었지요. 그 때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아니시면 도대체가 이룰 수가 없었던 막강한 힘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탈출 이후에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에 대한 체험을 숱하게 반복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의심하고, 떠나가고 심지어 우상을 거듭거듭 섬기게 되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맺으신 약속을 끝내 저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약속의 땅에 입성시키십니다.

판관들로부터 시작하여 사울과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열왕기의 이야기들이 정리가 되지요. 왜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으며, 그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용서하셨고, 우리가 다시금 하느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정화하고 회개로 이끌어주셨는지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오직 사랑하기 위하여 빚으셨습니다. 흙이라는 아담에서 아담이라는 흙에 당신 숨을 불어넣어, 당신 모상을 닮은 인간을 빚으시고, 그에게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하느님께서는 훗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실 큰 혜량으로 다시 한번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구해내시고, 기어이 모세를 통하여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저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모든 맥락에 무엇이 존재합니까? 바로 하느님의 무상성입니다. 그분은 내가 뭘 잘하고 잘못하고에 따라 나를 판단하시고 심판하시고 단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죄를 뉘우치고 돌아와 청하면 다시금 당신의 그 무한하신 자비로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으로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이셨습니다. 구약이 전하는 성경의 언어는 이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였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하느님의 자비라는 이 구약성경의 신앙언어가 어떻게 오독되느냐!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입기 위하여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잃지 아니하고, 선민이라는 절대적 지위를 상실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가 바쳐야 하는 613가지의 조문과 율법이 다시금 신앙공동체를 내리누르기 시작합니다. 그들에 의한 하느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바치고 빌고 조아리면 용서를 베푸시고, 일점일획 한점한획까지 씌여져 있는데로 행하지 않으면 영원히 꺼지지 않을 지옥불에 던져넣으시는 분. 그래서 우리와 같이 신앙하지 않거나 우리와 같이 생각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구원이 없고, 그들을 이방인과 같이 취급하고, 죄를 짓거나 세리와 창녀와 병든 자들과 같이 하느님의 자비를 입지 못한 이들은 모두가 다 죄인으로 선을 그어버려야 한다는 선민 사상이 팽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 때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느님은 당신들이 가르치고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언제 무엇을 잘못하는지 쬐려보고 있다가 곧바로 회초리를 휘두르려고 기다리는 고약한 영감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에,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다 똑같은 햇볕을 주시고 다 똑같은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시라고, 그분은 아침 새벽녘에 일하러 온 놈이나 해질무렵 겨우 일하러 나타난 놈이나 누구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지급하시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등에 칼을 찌르고 달아난 둘째 아들을 기다리기 위하여 문밖에서 서성이고 계시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라고!

성경을 통하여 드러난 예수의 가르침이 무엇이냐? 거칠게 표현하자면 공관복음서를 통하여 드러난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광야에서 돌아오신 그분의 첫 일성이 곧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그분 공생활을 꿰뚫은 근본 궤적은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었고,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에서조차 그분은 ‘다 이루었다.’는 말씀으로 숨을 거두십니다.

이토록 철저히 한 평생을 통하여 이루고자 했던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이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의 모순과 부조리와 억울함을 한순간에 일소시키는 전혀 다른 공간과 시간의 지배를 말하는가?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까지도 가상의 어떤 공간에 불과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와 고통이 사라진 적은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 라고 그러면 자꾸만 사람들은 이것을 어떤 시간과 공간의 영역으로 치환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간다, 천국에 갔다, 혹은 하느님 나라는 이런 곳이다, 하며 공간적 개념으로 이야기해야만 그것을 알아듣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는 그런 공간적 개념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분에게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하느님과 함께 계심을 의미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심> 그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이미 너희들 안에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미래를 향하여 열려져 있는 나라라는 조건을 붙이십니다. 그러니 인간 세상의 어떠한 모습을 두고도 완전한 하느님의 나라라 한 적은 없다하겠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하느님은 그 어떤 시간과 공간에도 한정, 제한되지 아니한 분이시기 때문에 지금과 여기라는 구체적 시공에서 완전히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미래를 향해 열려져 있는,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진행되는 나라라 가르쳤습니다.

대표적인 비유가 바로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마르코 복음에 이렇게 나옵니다. 4장 31절-32절,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지금과 여기라는 제한된 시공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씨앗보다도 작은 겨자씨 한 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땅에 뿌려지고 나면, 곧 미래이지요!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풍성해진다! 하였습니다.

우리가 현재 알아듣는 하느님의 나라는 그야말로 겨자씨만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 현재에 심습니다. 미래가 정확하게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심는다고 하여 그것이 우리 인간의 계획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는 엄격하게 따지자면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미국 땅에 건너올 때 어떻게 마음 잡수셨습니까? 미국가서 한 30년 40년 살다가 몇 살 되는 해 세례를 받고 조영만신부가 손님신부로 온 이곳 스프링스 한인성당에서 강론을 들어야겠다, 고 해서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모르긴 해도 딱 몇 년말 돈 많이 벌어서 다시 부모 형제 있는 고향 가서 살 생각들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현재이자 기껏 인간이 꿈꿀 수 있는 미래입니다. 하지만 꿈꾸는데로 미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뜻하지 않게 3년이 아니라 30년을 살게 되었고 뜻하지 않게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으며 뜻하지 않게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을 보고 이제는 손주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현재와 미래는 이렇듯 아주 대조적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그리고 여기라는 제한되고 한정된 시공 속에 하느님의 나라가 마치 완성된 것처럼 말해서도 안되고 강요해서도 안됩니다.

여기에 예수께서 보여주신 구원관이 당대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구원관과 명백하게 갈라지는 지점이 됩니다. 당대의 사람들, 곧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은 이미 하나의 완성된 구원체계 속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다인이라는 순수혈통을 최우선적으로 따졌습니다.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 히브리 사람 곧 유대 사람인 우리들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면 다 구원을 받느냐? 아닙니다. 유대인으로서 하느님의 율법, 곧 계명에 성실한 자들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그야말로 선택된 민족, 선민 이스라엘을 자처했습니다. 그렇다보니 무슨 일들이 생겨나게 됩니까?

구원이라는 것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자비여야 하는데 인간의 계명과 질서와 법이 우선하게 된 것입니다. 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서 제외된 자에 불과했습니다. 인간의 질서를 지키지 않는 자는 하느님께서 벌하시는 불충한 자로 책망받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병이었습니다. 왜 아프냐? 벌 받았기 때문입니다. 벌 받는 자들, 곧 하느님이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죄인으로 낙인 찍혀버렸습니다.

우리와 같지 않는 자는 모두 죄인이요, 원수요,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하느님조차 필요 없는 구원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이 없이도 율법이 있으니까 말이지요! 하느님 없이도 누가 죄인이고 죄인이 아닌지는 인간의 손에 달려 있으니까 말이지요!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선포한다고 하면서도 인간을 배척하고 판단하고 처리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 구원을 인간이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히틀러가 처음부터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순수 게르만인들의 위대한 승리를 위하여 몇몇 유대인들만 희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다음 그는 게르만의 영광을 위해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가기 시작했고 그 다음 사회주의자들을, 그리고 그 다음 천주교 신자들을 차례로 잡아갔습니다. 이렇게 자신들만 옳고 순결한 구원받은 자의 게토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 덕분에 늙고 병들고 쓸모없는 인간들을 죽어갔고 그렇게 600만명이 학살되었습니다. 이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말이지요.

선민, 구원받았다 자부하는 유다인들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들 속에서 예수는 선민적 구원관에 정반대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인간의 권위도 어떤 지배자도 감히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그 누구에게서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첫 번째 약속에 충실한 사람으로 살아갈 때 하느님의 나라는 그 누구에게서도 제외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유다의 종교 기득권자들이 죄인이라 불렀던 이들, 세리들, 병자들, 창녀들, 가난한 사람들, 이들 중에 단 하나도 하느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신다고 천명하셨습니다. 기득권자들은 비난을 일삼았습니다. 세리와 죄인과 어울린다고,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악의적으로 몰아세웠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눈도 꿈쩍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계약으로 열어놓으신 하느님의 나라, 곧 당신과 함께 하심의 공간에서 아무도 제외되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라고!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시며 도리어 율법과 제물 봉헌은 사람을 단죄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분의 함께 하심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고쳐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병은 죄 받는 것으로, 정신분열은 마귀들린 것으로 보았던 당대의 사람들을 향해 하느님은 벌주시고 보복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선포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치유를 용서와 일치시킨 그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병을 낫게 하심에 앞서 죄의 용서를 먼저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에게 하느님은 보복하시는 분이 아니라 용서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에게 하느님은 인간의 인과응보에 따라 벌하시는 분이 아니라 무한이 자비롭고 자유로우며 그 미래를 감히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대표적인 비유가 셋 있습니다. 첫째가 잃어버린 양의 비유입니다. 목자는 길 잃었던 양을 벌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벗과 이웃을 불러모아” 기뻐합니다. 한 마리아도 잃지 않고 함께 있고 싶은 목자의 심정이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참 모습이라 가르치신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잃었던 은전을 되찾고 기뻐하는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은전 한 푼조차 잃고 싶지 않은 부인의 마음이 한 사람의 인간이라도 잃지 않고 함께 계시고 싶은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여러분 잘 아시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호로자식입니다. 버림받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인간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가 아직 먼 거리에 있었는데도 아버지는 그를 알아보고 달려가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는 신을 신겨줍니다. 죽었던 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되자 죽었던 아들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라고 예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구원에 관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누구나 법 앞에서는 그렇습니다. 세심증이 발생합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면 벌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서도 우리는 아주 작은 것에도 두려워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음>보다는 법과 계명에 더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도덕적 우월감을 갖는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계명과 율법을 완벽하게 지킴으로서 그것을 절대화하는데에 있지 않습니다. 법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으로 보았고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법과 계명의 철저한 준수로 보았습니다.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그분은 법과 계명을 어겼고 유다인들의 눈에 이것은 위험한 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분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며 철저히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과 그분 나라에 대한 확신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그 바탕에는 하느님이 인간을 벌하시고 보복하시는 재판관이 아니라 그분이야말로 모든 인간 중에 단 하나도 잃고 싶어하지 않으시는 아버지, 아빠라는 체험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었던 예수의 체험은 이제까지 모든 종교의 역사 안에 등장한 적이 없었던 근원적이고도 대단히 독창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예수는 아빠이신 아버지 하느님만을 쫓았습니다. 그래야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버지를 쫓는다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이고 아버지의 뜻은 바로 베풀고 나누고 살리시는 분이심을 받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용서였고 자비였으며 사랑이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완벽해지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용서와 자비와 사랑, 이것만이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당신 뜻의 모든 것임이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당신께서는 자신을 위한 그 어떤 준비와 계획도 세우지 않으십니다. 그분에게는 오로지 아빠 하느님만이 전부였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아빠 하느님 때문에 내가 어떤 죽임을 당할 것인지 직감하신 것도 이 때부터였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그분은 끝까지 아빠 하느님과 그분이 함께 하시는 나라를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아빠 하느님 때문에 죽는다면, 그것이 아빠 하느님과 끝까지 함께 있는 길이라면, 죽음마저도 하느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 희망했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스승이 살 수 있는 계획을 하루라도 빨리 세우기를 바랬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하여 오늘 여러분처럼 수차례에 걸친 강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나라는 여전히 이 땅, 지금, 여기의 나라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완성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포기한 스승은 버림 받아 마땅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에 대하여 그들은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죽으면 끝인데 죽기 전에 뭐라도 해야되는 것 아니냐! 그래서 제자 중에 한 명은 스승을 자극시키기 위해 자기가 나서서 그를 은전 서른 잎에 밀고 해버리고 맙니다. 분명히 유다는 자기가 이렇게 하면 스승이 어떤 행위를 취할 것으로 본 것입니다. 하지만 스승이 아무런 응대도 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되어 십자가형에 언도되자 자살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가는 그 순간에 마저도 예수는 아버지의 뜻 앞에 자기의 계획과 자기의 뜻이 도리어 바뀌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이 기도가 놀랍습니다. 인간이라면 어찌 이 순간에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어떤 일이든 하실 수 있사오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데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토록 간절한 기도 앞에서도 아빠라 불렀던 하느님은 끝내 침묵하십니다. 그 어두운 겟세마니에서의 밤, 하느님의 이 어두운 침묵 앞에서도 예수는 하느님의 함께 계심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끝까지 자기가 변할 것임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구원을 떠벌리던 자야! 너 자신이나 구원해보아라! 비아냥거리며 조롱하는 자들 앞에서도 그는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고 도리어 아빠 하느님을 부르며 죽어갑니다.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이 말은 예수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 충실했음을 드러내는 말이고, 예수의 부활은 하느님의 함께 계심에 끝까지 충실했던 예수 생애의 당연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그 반대로 하느님의 함께 계심을 충실하지 못했던 부류들이 등장합니다.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는 자꾸만 깨어 기도하라 주문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말이지요. 여러분, 유혹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지 않는듯이 사는 것이 유혹 아닙니까? 모든 유혹이 무엇입니까?

믿음 좋고 잘 나갈 때는 유혹도 덤덤합니다. 하지만 어려움이 닥쳐보십시오. 첫 마디가 무엇입니까? 하느님이 어떻게 나에게 이러실 수 있느냐! 합니다.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하느님이 나와 함께 있지 않은 것처럼 생각해버리고 맙니다. 유혹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것을 더 잃을지 모르겠습니다. 제 아무리 큰 것을 잃어봐야 결국 죽는 것보다 더 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 때에도 여러분, 유혹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어떤 인간, 어떤 상황, 그리고 어떤 죄 중에 있었다 할지라도, 단 하나도 잃고 싶어하지 않으시는 아버지, 끝까지 함께 있고 싶어하시는 아빠 하느님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겟세마니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과 함께 있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그는 끝내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느님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함께 계심’에 깨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기 자신 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당연히 살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침묵하시는 하느님은 그들에게 계시지 않는 것으로 느낀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길어질 수록 신앙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믿음이 약한가, 절감합니다. 대부분은 하느님의 침묵 앞에서입니다. 그분은 침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침묵 속에서 함께 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는 만나지 못합니다. 예수께서는 끝까지 그 침묵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예수에게 갖는 첫 번째 탄복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리고 그는 죽음 앞에서조차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모든 것은 성경이 시작과 마침에 등장하는 모든 내용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나와함께 계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무상적으로 모든 것을 베풀어주시고 내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펼침으로서 나와 다른 이들을 향한 포용을 자비를 만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 누구도 단죄하여선 안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나만 절대로 옳아서도 안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우리는 곧 그리스도교 신자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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