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1 1/203 회원가입회원로그인
  View Articles
 님께서 남기신 글 (2018-12-02 07:40:35, Hit : 382)
<주여, 왜?> 대림 제1주일 사이판 한인성당

<대림 제1주일 사이판 한인성당 강론>

(INTRO)
사이판보다 적도에 좀더 가까운 미크로네시아 제도에 사는 원주민, ‘치누’족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답니다. “밤에는 바다의 물고기가 별이 되어 하늘을 헤엄쳐 다닌다.”
태풍으로 온통 캄캄해져버린 사이판의 밤하늘 별이 유난히 빛나는 요즘입니다.  
잊고 있었습니다. 별은 우리가 사이판을 사랑했던 이유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이래저래 답답하여 치켜든 하늘엔 더 선명하게 별이 빛나고 있답니다.  
너무 밝게만, 너무 빛나게만 달려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불이 꺼져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지요.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림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내 삶이 집중해야할 현장을 알기 위하여 다른 것들은 좀 꺼두는 시간이 시작되지요.
제대에 밝혀진 첫 번째 대림초를 여러분과 함께 마주할 수 있음에 대하여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미사를 시작할까 합니다.
상하고, 깨지고, 두려웠던. 그 마음들을 나눕시다.
그리고 우리 다시 사랑합시다.
잠시 침묵으로 대림 제1주일 미사를 준비합시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아픔과 상실과 병고를 겪고 있는 저희와 태풍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사이판의 모든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저희와 이웃들이 저마다의 환경에서 어려움을 이기고, 마음을 열어 고통당하는 이웃들을 돌보며,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갖출 수 있도록 저희의 영혼을 이끌어주십시오.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강론)

<주여, 왜?>

한 두달 되었습니다. 안식년이 확정된 상황에서 이런저런 일정들을 조절하는 통에, 사이판 장신부님에게 올해 대림 특강 요청이 온 것입니다. 크게 망설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겨울이 시작되는 길목에서 이 따뜻한 사이판을 한 주간이라도 살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큰 행운이니까 말입니다.

옳타쿠나! 덥썩 물었지요. 그게 이 난감한 자리의 서막이었습니다. 이런 사이판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일단 들어오는 비행기가 좀처럼 확정이 안되었습니다. 근 20일이 지나서야 티켓을 확보할 수가 있었지요. 이미 수차례 사이판행 비행기를 타보았지만, 3일전처럼 그렇게 널널한 좌석의 비행기를 탄 것 또한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당도했을 때의 풍경은, 한국에서 뉴스로 보았던 영상보다 훨씬 더 잔인하더만요. 원주민들의 가옥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고, 수령을 헤아릴 수도 없는 고목들은 뿌리채 뽑혔으며, 멀쩡해보이는 차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한 달이 지나 상당부분 복구되었다는 것이 이 정도였으니까, 그 이전의 상황은 저로서는 쉽게 가늠하기조차 힘들었지요. 그리고 이 성당. 이미 부산교구 주보를 통해 소식은 전해들었습니다만, 막상 와보니 가슴이 답답하였습니다. 날아가버린 교육관 지붕과 성당부속 건물들은 그렇다치고, 30년 사이판 한인성당과 함께 해왔던 예수성심상이 박살이 난 장면을 놓고는, 정말 신자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내 집이 부서지고, 침대가 날아가고, 대부분의 가정들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집 전체가 달아나 구호물자와 천막에서 연명하고 있는 원주민들을 생각하면 힘들다 소리 꺼내기도 쉽지 않고, 그나마 다친 사람 없으니 이나마 다행이다 하다가도, 그 숱한 세월 버텨내던 예수성심상이 박살난 것을 보면서, 지난 30년 이곳에 삶의 자리를 꾸렸던 우리네 신앙 역사 한 토막이 산산조각 나버린 것처럼 느꼈을 그 상실감이 전해졌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막막했을까? 그 두려움이 깊고 짙어 이제는 이곳에 더는 못 살겠다고 짐을 꾸리는 이들마저 생길 정도라고 하니, 막상 그런 곳에 날 받아놓고 들어온 이 신부는 환장할 지경이었지요. 우선 신자들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제부터 면담성사를 시작했습니다. 부서진 건물이나 창문이야 시간 지나면 어째어째 고쳐지겠지만, 우리네 마음을 태풍보다 더 강하게 휩쓸어버린 공허와 두려움. 한 분 한 분 만나 그 부서진 마음들을 추슬러드리자 싶어, 제 개인 일정 모두를 접고 어제 오늘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일 오전까지도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면담하고 성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제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어쩌면 고통 속에 있는 분들에게 어떤 말조차 필요치 않음을 알면서도 명색이 이 난국에 특강 강사로 불리움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의 목적이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책 한 권을 뽑아들었는데, 제목이 <주여, 왜?> 까를로까레토 수사의 책이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까를로 까레토 수사는 알프스 마테호른 봉우리에서 산악구조대 봉사를 하며 살고 싶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어느날 등반길에서 친구였던 간호사의 잘못된 처방으로 하루 아침에 다리 한 쪽을 쓰지 못하는 불구자가 되지요. 다리가 한 쪽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알프스의 산맥을 오를 수가 있겠습니까? 30년을 남은 한 다리로 원망하며 살았을 수도 있던 그 사람이 비참함을 무릎 쓰고 지팡이를 짚어가며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찾아왔는지를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여, 왜?> 라는 책의 주제이자, 과정이지요. 그렇습니다. 고통은 항시 우리에게 왜? 냐고 질문합니다. 왜 나고, 왜 지금이고, 왜 이지경이냐고? 소리쳐 물어보아도 고통은 우리에게 답을 주지 않습니다. 어느날 우리는 그렇게 고통에 초대를 받은 것 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고통이 저를 초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대림을 시작하며 고통에 관한, 그리고 그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한 것입니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고통이 비일비재합니다.

세상의 병원에는 지금도 신음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세상 곳곳에서는 가난에 찌들린 이들의 남루함이 그친 날이 없습니다. 우리가 좋고 맛나고 화려한 것으로 감싸고 있어서 그렇지 우리집 대문 한 발짝만 나가도 화장실도 없이 살아가는 이들은 부지기로 널렸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하루의 때거리를 걱정하고 있으며 마음껏 구걸이라도 할 수 있는 자유를 찾아 지금도 국경을 넘는 이들도 있습니다. 가진 자들이 쏟아붓는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는 이들은 언제나 무력한 아이와 여성들이고 그들은 세상 창조부터 지금까지 폭력의 위협에서 자유로왔던 적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고통들. 이 많은 자연 재해들. 아무 잘못 없이, 아무 이유 없이 당하고 터지고 깨져야만 하는, 이 가격 표시조차 없는 고통의 출처에 대하여 우리는 질문할 자격이 마땅히 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러시냐고!”

왜 이른 바 하느님이라고 하는 그 분은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고, 왜 하느님은 적절하고 필요할 때 개입하지 않으시냐고, 왜 하느님은 우리 집이 토막나고 예수상이 부수어질 때 우두커니 서서 보고만 계시냐고! 왜! 왜! 왜!

대답을 좀 해보시라 노려보는 우리에게 고통처럼 그분 또한 침묵하십니다. 그리고 분명한 답 한 가지는 내가 목청 터져 외친다할지라도 지금 우리들이 처한 상황의 단 한 줄도 바뀌거나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맥이 빠집니다.

하느님이 없는 것이 아닐까? 만일 계시다면 그분은 왜 행동하지 않으시는가? 왜 나에게만은 예외를 베풀어주시지 않으시는가? 숱한 생각을 하고, 원망을 하고, 누군가는 끝내 그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으려고도 합니다. 모든 인간 군상 안에 능히 일어날 수 있는 대목이자 반응입니다.

고통은 그렇습니다. 고통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을 흔들어놓습니다. 이것이 고통이 지닌 첫 번째 미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방금까지 말씀드린 고통, 누구도 초대하지 않았으나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불청객인 고통, 내가 원하지 않은 때와 내가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나를 곤경과 당혹스러움으로 밀어넣는 그 강도의 세기에 대하여 고통은 이제까지 내가 경험하지 못한 전혀 다른 세상으로 나를 밀어넣으려고 함을 우리는 느낍니다. 어쩌면 사실, 고통 그 자체보다 고통이 이끄는 다른 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더 힘들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은 고통의 두 번째 꼭지가 이것입니다. 고통은, 고통 그 이전의 삶으로 내가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 앞에 우리 삶을 중단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요. 고통은 이제껏 내가 계획하고 내가 프로그램하고, 내가 정해놓은 모든 틀을 엉클어버릴만큼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껏 살아왔던 내 삶의 방식과 목표를 한꺼번에 수정시킬만큼의 큰 에너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있지요.

사실 우리 중에 단 한 사람도 고통 그 자체를 없앨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하느님께도 불가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하느님의 아드님이 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갈실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언제나 고통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고통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고통 그 자체에 매달리면 우리에게 출구는 없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대하는 태도! 이것이 고통의 크기를 결정합니다. 지금 우리가 닥친 상황은 어렵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큰 것으로 만들 수도 있고, 작은 것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태도입니다. 여러분. 고통을 어떤 것으로 만들고 싶으십니까?

까를로까레토 수사는 자신의 고통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합니다.
“불운했던 그 일이 나를 새로운 길로 밀어넣었습니다. 잘못된 주사로 말마암아 나의 다리가 마비되었으나, 이는 불운의 마비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산에 오를 수가 없게 되었으나, 그래서 나는 짚차를 타고 다니는 기상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있고 싶어했던 곳과는 상관없이 나는 산 대신 사막을 걸어다니게 되었고, 등반 코스 대신에 사막을 지나는 대상들의 코스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산 대신 사막을 침묵과 기도를 위한 특별한 환경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언제나 달리기만 하던 내가 이제는 서 있으며, 언제나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보려고 허둥대던 내가 이제는 서서 한 가지를 제대로 하게 되었었습니다. 저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 사고는 나에게 보탬이 되었습니다. 물론 사고 자체는 불행한 일었으나, 하느님께서는 이 불행하고도 불운한 사고를 은총으로 바꾸어놓으셨습니다. 다만 아주 조금의 시간이 더 걸렸을 뿐입니다.”

신앙은 어디에 있느냐? 당신에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를 따지듯 물을 때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때 답을 즉각적으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한 대 갖다 쳐 보면 압니다. 한 대 심하게 맞아보면 압니다. 그 사람이 고통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그것을 보면 그 사람 안에 있다는 신앙의 정도가 드러납니다.

오만 기도를 다하고 오만 순례를 다하고 성당에서 오만 상임위원을 다 했다는 사람조차도 조그만 강도의 고통이 휘몰아쳐 보십시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방방거립니다. 아닙니다. 고통이 당신을 더 깊은 곳으로 이끌고자 하는 그 새로운 대문에 대하여 그는 알지 못합니다. 정말로 신앙인이라면, 주여, 왜? 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지를 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 고통을 통하여 내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이 고통을 통하여 내가 무엇을 얻기를 바라십니까?
이 고통을 통하여 내가 얼마나 더 성장하기를 바라시며,
이 고통을 통하여 내가 얼마나 더 내려놓기를 바라시는지,
그것을 물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그 고통 그 이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태풍에 날아가버린 것을 다시 주워오지 않기를 저는 바랍니다. 그것이 없더라도 우리는 능히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나의 힘을 능가하는 어떤 에너지가 나에게서 무엇인가를 앗아갔다면, 그것은 내 삶에 덮씌워져 있던 어떤 부가세와 같은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없이 살았던 것을 너무 많이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삶이 조금 더 가벼울 수 있다면, 물론 태풍을 더 기다리는 것이 아니지만, 날아갈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잃을 것에 대하여 더 조바심내지 않고, 어디든 떠날 수 있고,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삶에 대하여 다시금 깊이 인식할 수만 있다면, 저는 이 태풍이 우리에게 더 이상 큰 고통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을 땅의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행에 빠트리도록 기다리시는 분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 그분은 나와 달리 대단히 신실한 분이시기에, 그분은 어떤 지경의 나라 할지라도 나를 기다리시고 나를 필요로 하시는 분이시며, 오직 나 하나 잘 되기 위하여 당신 아들마저도 조금도 망설이지 아니하시고 기꺼이 내어주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런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 세월이 갈수록 명료해지기까지 우리는 크고 작은 고통과 상처와 괴로움을 반복할 것입니다. 하느님 말고 내가 쏟아넣었던 많은 것들의 부질없음을 받아들이기까지, 너울 같고 거죽 같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그 숱한 허깨비 같은 것들로부터 내가 자유로와져,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 내 한 몸 세상에 나서 잘나봐야 비석 하나 세우고 나면 그만인 주제들이 그토록 맞고 안맞고 떠들고 사는 이 삿된 부질없음에 대하여, 고통은 그렇습니다. 우리를 한꺼풀 더 벗겨준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통이 없었다면 우리는
안락한 유리병에 갇힌 개구리처럼 저 하나 바라보는 것만 전부인 줄 알고 살았겠지요.  
고통이 없었다면 우리는
나와 함께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처한 현실에 대하여 더 없이 무감각했을 것입니다.
고통이 없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연민하지 못하며, 왜 저렇게 살아가는지 퉁명하였을 것입니다.
고통이 있기에 우리가 달리 보고 달리 말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고통을 겪었기에 비로소 우리는 사랑을 압니다! 라고 말이지요.
저는 도무지 고통이 없는 사랑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
저는 도무지 기다림이 없는 사랑에 대하여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저는 도무지 나와 뜻이 다른 사람을 고통 없이 사랑하는 법에 대하여 알지못합니다.

만일 우리가 지구상에서 약간의 고통을 겪음으로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면, 그 고통이 아무리 참혹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리 무서운 일이 아님에 대하여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고통은 그렇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질문에 답하지는 않으나, 고통은 우리가 어떻게 더 사랑할 수 있는지에 관한 새로운 대문을 언제나 열어주었습니다. 고통을 겪지 않은 자가 아니라, 고통을 겪고 더 큰 사랑이 되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고통의 이마에 써붙이는 이름표입니다.

분명히 고통을 허락하신 분은 하느님이시나,
그 상처를 나에게 허락하심으로서,
그 상처를 통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이끌어내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봉헌하는 고통의 가장 큰 신비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받았고,
그분 상처를 통하여 우리가 죄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입었노라 숱하게 노래하면서도
왜 우리는 정작 나에게 닥쳐온 고통 앞에서는 그저 주님, 왜? 라는 소리만 치고 앉아 있는 것인지!

왜 우리는 이 고통을 통하여 나에게서 가장 좋은 것을 이끌어내시려는 하느님의 의지에 대하여 더 깊이 신뢰하지 않는지!
왜 우리는 이 상처를 통하여, 나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으로 이끌어내시려는 그분의 선의에 대하여 더 깊이 의탁하지 못하는지!

그렇게 믿고 기도하고 숱하게 성체를 모셔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나는 왜?
하느님보다는 다시 나를 믿고, 다시 내가 가진 것을 믿고, 다시 내 고집과 내 경험과 내 성질의 단 한가지라도 수정하거나 바꾸려고 하지 않는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믿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당신께 의탁하는 신실한 자녀되기만을 바라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여러분, 아멘!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불리움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에 대하여 성경을 통틀어 그들이 당했던 숱한 고난을 다시금 말씀드리기에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넉넉지 않습니다. 다만 간결하게 전한다면 이것이지요.

우리는 자녀이고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이 복음서의 알맹이입니다.
그분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로서 누릴 영광과 기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 갔던 모든 순교자들, 성인 성녀들의 공통된 증언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있으나, 그분의 날에 이르면 곡식단 들고 오며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되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고통이 없어서도 아니고, 병고가 없어서도 아니고, 눈물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그 사실 하나 때문에, 충분하고, 그 사실 하나 때문에 능히 지금보다 더 한 일을 당하고 겪는다 할지라도, 나와 함께 계신 하느님 때문에 저는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그리고 여러분의 남은 인생과 여러분 자녀들의 생애에 걸쳐 고통이 없기를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보다 더 한 일도 우리는 만날 수 있고 당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도 저는 여러분들과 여러분의 자녀들이, 하느님과 함께 있기만을 기도할 것입니다. 그것만 있다면, 내가 어떤 지경이라할지라도 하느님과 함께 있기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고, 다시금 더 좋은 것으로 우리를 갈아입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다 사용했습니다. 저는 이 미사 후에도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며, 성사를 드리고 병고를 입은 가정에 봉성체를 가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드려고 하는 이유는 하나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을 믿고, 예전보다 더 나은 공동체로 우뚝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아멘!  

(예물기도)
주님, 저희에게 허락하신 고통을 통하여도 은총을 얻고자 하는 이 신실한 신앙인들의 정성을 어여삐 여겨주시어, 눈물 속에서도 기쁨을, 아픔 속에서도 치유를, 상처 속에서도 용서의 은총을 가득히 내려주시어, 저희의 이 부덕한 삶마저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귀한 예물이 되게 해주십시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주님 오실 것을 깨어기다리고자 봉헌한 이 성찬을 통하여, 저희가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를 살면서도 이속에 깃든 하느님 나라를 일구기 위하여,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밝히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들이 되게해주십시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Prev  <즈카리아의 두려움>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콜로라도 스프링스 한인성당 [1]
Next  <감사합니다!>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3]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u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