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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2018-12-27 00:59:17, Hit : 186)
<한 아기 2> LA 토렌스 한인성당 성탄대축일 미사

<103위 한인성당 성탄절 미사>

<한 아기>

세상 사람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누구나 ‘부모’를 가지고 있고, 또 누구나 ‘고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 ‘출발’에 관한 이야기들이지요.
그리고 그 출발 이후 우리들은 부모와 고향을 떠나 살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빨리 벗어나고도 싶었고, 나이를 먹고는 잊어버린채 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말합니다. 삶에 지치고 힘들 때, 세상 누구도 모르는 나의 마음이 위로받고 싶을 때, 부모님 생각이 나고 고향 생각이 난다고 말이지요.

오늘 우리는 성탄절을 지냅니다. 멀리 떨어져 있던 자녀들이 부모를 찾아오는 날이고 저마다 간직된 마음의 고향, 각자 출발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날입니다.

우리들의 시작은 아주 볼품이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너무나도 작은 아기들이었고, 제 손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연약한 생명, 그런 우리가 할 줄 알던 것이라고는 고작 ‘먹는 것’과 ‘자는 것’, 그리고 ‘우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출발이 똑같은 그런 아기들이었지요.

혼자 두었으면 결코 살아 남을 수 없었던, 여린 생명을 나의 부모는 아주 오랫동안 품어주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때, 그들은 나에게 이름을 주었고, 종일토록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으며, 나의 필요를 모두 채워주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나에게 든든함이 되었고, 사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더 이상 부모가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어른이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나를 기억하며,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부모가 그렇고, 고향이 그런 것이니까요.

사람이 출발을 모르고 근원을 모르면 교만하게 됩니다. 제가 잘나 이리 사는 줄 알고, 부모 없이 나만 잘난 사람으로 살아버립니다.

종교는 인간의 시작과 마침에 관하여 질문합니다. 종교는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고향>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왜 나고, 왜 살고,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관하여 태초부터 질문해온 인간의 역사가 바로 이 자리, 종교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주 연약한 한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세상은 그에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주었지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그저 작은 한 아기의 모습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땅에 오셨을 적에 왜 그분은 좀 더 근사한 방식을 택하지 않으셨을까?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면 왜 더 강력한 힘의 방식을 선택하지 않으셨을까? 왜 벌거벗은 채, 가난하게, 집도 절도 없이 말구유에서, 이토록 연약한 모습으로, 어두운 밤에, 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박해와, 하필 사람으로 나셨을까?

이 많은 질문에 대한 답은 한 가지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방식의 사랑>이기 때문이지요.

임금의 옷이 아니라 벌거벗게 태어난 것은, 모든 것을 버려야만 사랑이 시작됨을 알리기 위함이요, 부유함이 아니라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하느님만을 유일한 부富로 여겨야 함을 전하기 위함이며, 고운 침대가 아니라 말구유에 태어난 것은, 세상의 모든 거처가 거룩하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강한 모습이 아니라 연약함으로 태어난 것은, 사랑은 누구에게도 두려움을 주지 않음을 알리기 위함이며, 낮이 아니라 밤에 태어난 것은, 우리가 어떤 어두움에도 빛이 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알아보게 하기 위함이고, 박해 중에 태어난 것은, 우리가 어떤 어려움도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며, 이처럼 단순한 모습으로 태어나심은, 우리가 복잡한 것들을 버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모든 인간을 사랑이라는 본 고향으로 데려가고자 하십니다. 아마도 그가 아주 높은 곳에서 우리에게 손짓했다면 우리는 두려워는 했을 것이나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대단히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이끌었다면 우리는 그에게 복종은 하였을 것이나,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토록 벌거숭이로, 가난하게, 말구유에서, 연약한 모습으로, 어두운 밤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박해 가운데 나신 그분이신지라, 우리는 그를 더 쉽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잃었을 때는 내가 연약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강할 때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내가 낮을 때가 아니라 한 없이 내가 높았을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평화를 잃었을 때에는 내가 단순할 때가 아니라 너무 많은 생각으로 복잡해졌을 때입니다.

저는 오늘 이 성탄의 날에, 우리들 자신이 조금 더 단순해지시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에 관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 이 성탄의 날에, 우리가 조금 더 따뜻해지시기를 희망합니다. 오로지 사랑에 관해서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빛이 새근거리는, ‘허리 숙인’ 밤으로 들어오십시오. 내 인생의 출발점을 잊고, 시작이 어디였는지를 잃어, 부유하면서도 바쁘고, 먹으면서도 공허하고, 떠들면서도 침묵이 부족했던 우리들에게 그분은, <한 아기>를 보게 하십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1-4)

하느님의 시작을 요한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방식을 똑같이 알려줍니다. 말씀과 생명과 그리고 빛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광주리가 바로 우리 앞에 놓이 저 구유입니다.

<구유>를 통하여 그분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방식을 알아차리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높고 내가 잘난 승리자가 아니라, 오로지 말씀과 생명과 빛만을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우리에게 밀어 넣으셨습니다. 그분은 이토록 간절하게 우리를 원하십니다. 차라리, “당신이 모든 것을 짊어질터이니 너희는 행복하라!” 하셨던 그 아버지의 절박함으로 그분께서는 이 구유에 당신의 모든 것을 쏟아넣으셨습니다.

지금 우리 안에 놓인 한 아이는 강하게 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이 아이는 오히려 무력하게 더 없이 낮은 모습으로 자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이 아이는 승리하는 법을 익히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잘 지고 잘 죽고 잘 떠나는 법을 익힐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이 아이는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임을 유일하게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아이를 가슴 속에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지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겠지만, 그 때마다 이 아이는 우리에게 속삭일 것입니다. “나도 그랬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그리고 “다시 시작하라!”고, 이 아이는 우리에게 희망을 제안할 것이고, 믿음을 북돋울 것이며, 절대로 어떤 순간에도 사랑을 포기하지 말라며 우리의 눈을 바라볼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성탄의 날에 이 아이를 여러분에게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이 주는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희망을 여러분들에게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잘나고 높은 방식이 아니라, 이기고 성공하고 다른 사람을 내리 누르는 방식이 아니라, 낮고 작고 연약하지만,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세상을 이기시는 새로운 질서를 여러분들에게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이 아이가 날 때, 누구도 이 아이를 주목하지 않았듯이, 단지 부모들만이, 그리고 고향의 별빛과 목동들만이 이 아이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듯이, 교회는 여러분들에게 다시 고향이 되고자 합니다. 여러분 신앙의 부모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고향이 있어 든든한! 부모가 있어서 당당한! 그러니.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향하여 용감해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바로 이 아이, 예수의 눈망울을 품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고, 우리는 바로 이 아이, 예수의 입김을 간직한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제든 이곳으로 오십시오. 그리스도의 구유 앞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여러분들의 삶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잊어버리고,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불안과 불만과 불행이 나를 무력하게 만들던 그 어느 날, 부모를 찾고 고향을 찾듯, 교회는 여러분들 곁에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여러분들의 고향이요 이곳이 우리 자녀들의 부모가 되어줄 것입니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삶의 자리를 일구고 계시는 모든 교민분들과, 특별히 이곳에서 신앙의 터전을 일구고, 하느님 나라라는 영원한 고향을 향하여 오늘도 한 걸음을 내딛고 계시는 103위 성당 모든 교우분들께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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