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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2018-12-31 06:24:05, Hit : 363)
<간직하였다!> LA 토렌스 103위 한인성당 교중

(성가정 축일, 토렌스 한인성당 아침)

(INTRO)
이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이어져 온다는 것은,
세상 사람 숫자만큼의 어머니와 또 그 숫자만큼의 아버지가 계셔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있어야 할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켜준 사람들.
그 덕분에 오늘도 한 가정이 이어지고 있음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103위 한인성당의 모든 가정이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성가정 될 수 있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겠습니다.
잠시 침묵으로 우리 각자의 자리.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지를 돌아보도록 합시다.

<간직하였다!>

저는 지난 성탄 전날 콜로라도에서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물론 LA 아는 사람이라고는 본당 주임신부님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성탄절 오후에 저를 찾아온 이들이 있었습니다.
20년 전 이곳으로 이민을 떠나왔던, 저의 출신 본당 주일학교 교사 가족이었습니다.
반가움은 잠시였구요, 이들은 아주 슬픈 소식을 저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어젯밤 아버지가 병원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늦은 나이에 이민을 떠나와 한국을 그리워하시던 아버지께서 2년 동안의 투병을 마치시며
자기를 이곳이 아니라 한국 가족들 곁에 묻어달라 하시더랍니다.
그 때부터 유가족들과 저는 분주해졌습니다.
미국 장의사와 연락하여 시신을 모실 직항편을 알아보고,
인천에 도착하면 이어질 고향 부산의 장례식장까지의 운구 절차와 빈소 문제,
그리고 다시 한국식으로 염을 수습하는 예절과 매장지를 알아보고 결정하기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그들이 원하는 한국에서의 장례가 무사히 치러질 수 있기를 바랬지요.

어제 전화가 왔습니다. 무사히 한국에 잘 도착해서 아버지의 장례를 잘 치르고 있다고,
1월 2일 부산의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거행하고 장지도 고향과 가까운 곳에 모시게 되어
감사하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끌고 있는 것일까? 그냥 이곳을 제2의 고향이다, 생각하고 묻힐 수도 있습니다. 사람 나는데가 정해져있고 가는데가 정해져 있겠습니까? 그저 남아 있는 사람 덜 괴롭게 조용히 떠나갈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굳이 아버지의 마지막 뜻을 받들고자 합니다. 다른 이유는 아닙니다. 7,80이 되어도 고향은 고향인 것이고, 가족은 가족인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이 타향까지 나와 살이를 하는 큰 이유는 없습니다. 가족 때문이고, 가정을 일구고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은 세상 모든 성공과도 함부로 맞바꿀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가족을 통해 이익을 챙긴다면 그것은 아주 나쁜 사람이지요. 가족은 이렇게 손해보는 것을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집합입니다. 아무 희망이 없어도 다시 살게 하는 힘이 가정이고, 동시에,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그것이 파괴된다면 살아온 생이 일순간 무너져 내릴 위태로운 근원 또한 가정입니다.

최근에 나온 교회의 공식문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있지요. Familie ‘가정’입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도 불과 몇 년 전 ‘가정사목 위원회’를 구성하고, 각 교구마다 가정을 사목의 중심에 놓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교회문헌뿐 아니라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각종 선언문에도 가정이라는 단어는 이제 핵심적인 의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가정이란 주제가 강조되고 부각되는 것은 하나의 이유 때문이겠지요. 그만큼 현대의 가정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가정의 위기 시대에 우리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지내며, 그 가정을 가장 모범적인 가정으로 본받기를  요청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 가정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본 받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저는 복음에서 아주 간단한 힌트 하나를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라는 말씀이 바로 그 키워드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헤매다가 겨우 찾은 아들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나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가슴 졸이며 찾아나선 부모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 보입니다.  

이 복음말씀을 듣고 받은 첫 인상이 ‘뭐 이런 버릇없는……’이라는 느낌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복음사가 루카는 분명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이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의도는 분명합니다. 인간적인 걱정이나 염려, 조바심을 넘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 구절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문제는 당신의 아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어머니 마리아의 태도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에 대해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고 있다고 해서 외면하거나 무시해 버리지 않습니다. 자기 멋대로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이런 태도는 루카 복음서에서 두 번 더 나옵니다.

한 번은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 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면서 모든 것을 맡기신 부분에서 그 태도가 드러납니다. 또 하나는 출산 때에 목자들이 찾아와서 그들이 들은 것을 말할 때의 장면입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2.19).”

성모님은 참된 진리를 몰랐습니다.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처녀인 자기가 왜 아기를 가져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어렵게 출산을 하고 누워있을 때 온 산을 헤집고 다니던 목동들이 들이닥쳐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를 왜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그렇게 모른다고 무시해버리지 않습니다. 외면하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마음 속에 간직합니다.’ 기억합니다.

모르고 있으면서도 간직하는 것과, 모른다고 외면하고 무시하는 것과는 천지차이입니다. 간직한다는 것은 마음 속에 담아두고 되새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사건이 손상되거나 변질되지 않도록 원형을 곱게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진리의 빛 속에 드러나게 될 때 그 의미를 온전히 알게 될 때까지 그 사건 안에 머무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게 간직한다는 말이 지니고 있는 속뜻입니다.

진리가 지닌 속성이 그렇습니다. 숨어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알 수 있게 드러나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진리를 ‘감추어져 있지 않음’이라고 Aletheia라고 불렀습니다. 감추어져 있지는 않지만 잘 드러나지도 않는 것, 그래서 그 진리를 알기 위해선 일단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그저 잘 간직하고 보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처음엔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 모르다가도 천천히 그 의미를 파악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태도가 바로 그것이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게 가정생활의 힌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수 십 년을 같이 산 부부라고 해도 이해 못 할 말도 여전히 많고, 저 양반이 왜 이러나 싶을 때도 참 많이 있습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것이 우리네 삶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배 아파서 낳은 자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며 자기 기준으로 판단해 버립니다. 그러나 보니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갈수록 좁아집니다. 남편에 대한 이해도, 아내에 대한 이해도, 자식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좁아지면서 갈등이 생기도 몰이해가 생깁니다. 그게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오늘 복음의 성모님의 태도를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잘 모르면서도 그저 잘 간직하는 모습, 그게 서로에게 얼마나 힘이 되고 보탬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 간직하는 자세를 은혜로 청해봅니다.

그 때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그 길을 걸을 차례입니다. 제가 15년 전에 썼던 강론을 토렌스 한인성당 교우분들께 전해드리며 이 강론을 맺겠습니다.

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맛있는 반찬은 아버지와 저희들을 주시고 어머니는 우리가 남긴 생선 대가리며, 뼈를 발라 드시는 걸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깝다 못 버리고, 새 옷 한 벌 넉넉히 못 사 입으시면서도, 그래도 설빔이니 추석빔이니 하며 명절이면 아동복 큰 칫 수만 사준다고 투덜거렸는데, 어머니는 작년, 그 제작년 그대로인 옷을 저는 몰랐습니다.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남편 벌이로는 아이 넷 키우는 일이 힘들어 시장바닥에 좌판을 깔고 앉아 계셨을 때, 아들은 그 모습이 부끄럽다고 어머니 앞으로는 지나가지도 않고, 몇 일째 화를 내고 있던 어느 날, 어머니는 잠든 저를 어루만지시며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가장 죄스럽습니다.

아버지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직장과 노동일에 시달리시면서도, 집세와 생활비에 빠듯하시면서도, 아들이 놀아달라고 하면 기꺼이 야구도 탁구도 함께 해주시던 아버지, 전 그 때, 아버지도 저처럼, 즐겁기만 한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성적 떨어져도 괜찮다고 다음에 다시 잘하라고... 등을 토닥거려 주시면서도 당신 속마음은 서운함으로, 그리고 어머니는 자식들 앞에서 울 수 있지만 아버지께는 그 자리마저도 없었음을,

아버지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술 취하신 다음, 자는 우리들을 일일이 어루만지시며 노래를 부르시던 모습이 너무 싫어, 술 좀 잡숫지 말라고 대드는 아들에게 미안하다, 잘못했다 하시며, 슬그머니 등을 돌리시던 아버지 모습이,

아버지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어느날, 늦은 시간 동네 어귀에서 소주 한 잔 하시고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오시던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뒤를 따라 걷고 있자니, 아, 아버지의 그 크셨던 어깨가, 왜 그리 작아보이던지요, 이젠, 아버지가 아닌 그저 당신 모든 것 내어주시고 당신은 줄어가는 초로의 아저씨로 늙어갈 때, 저는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만큼 자라있었습니다.

성가정 축일입니다. 그 때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간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자녀들도 훗날 그러할 수 있기 위하여, 잘 간직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 땅의 모든 아버지, 어머니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눈 강론을 읽으며
먼저 가신 아버지가 그리워 눈물 짓게 합니다.
아버지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줄 알았습니다.
어찌 이리 제 맘을 두드리시는지요
그때는 저도 어머니, 아버지가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못난딸, 이제야 후회해 봅니다.
그 좋아 하시는 멍개 이제 원 없이 사드릴수 있는데 ...
  2019/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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