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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2019-01-06 17:37:33, Hit : 189)
<이게 그럴 일이야?> 주님 공현 대축일 전야 미사 LA 토렌스 103위 한인성당

<주님 공현 대축일 전야미사>

(INTRO)
오늘은 주님 공현대축일 전야입니다.
공적인 현현, <드러남>을 기억하는 것이지요.
이 공현은 오늘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3주간에 걸쳐 주님의 세례사건과  
가나의 혼인잔치를 통한 주님의 드러나심을 기리게 될 것입니다.
드러나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었던 하느님의 신비에 대하여 집중하게 하지요.
감추인 것들이 드러나기까지 우리의 눈은 주님만을 바라나이다.
평생을 기도하였던 교부들의 가르침 따라 오늘 이 미사를 더욱 정성껏 거행합시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강론)  

<이게 그럴 일이야?>

저는 지난 주간, 주임신부님의 배려로 요세미티와 샌프란시스코 투어를 다녀왔습니다. 비경이었고, 대단히 매력적인 도시들이었습니다. 문제는 투어라는 이름으로 뒤섞이게 되는 한국사람들이지요. 대부분 가족 혹은 친구 단위로 온 일군의 무리들이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며 보내야 하는 3박 4일의 일정 속에, 중년의 한 남성이 독방을 써가며 말도 없이 지내는 모양새가 마땅찮았는지, 이틀을 넘기지 않아 질문이 시작됩니다. 첫 질문이 무엇이겠습니까?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한국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숫자 하나로 모든 것은 교통정리가 되지요. 내가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숫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대접을 해야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일말의 책임감을 지녀야 합니다. 아, 정말 피곤한 일입니다. 왜 한국 사람들은 죽어라고 이 나이를 따질까요? 나이 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어서 그럽니까?

싸울 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로 큰 걸로는 잘 안 싸웁니다. 보통은 시덥잖은 자존심 때문에 발단이 됩니다. 대충 말 몇 마디 하면 끝날 싸움을 증폭시키는 뇌관이 있습니다. 뭐죠? 똑같습니다. “니 나이 몇 살이야?”

이 소리가 터지면, 싸움은 쉽지 않습니다. 이제껏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모든 이유는 깨끗이 사라집니다. 그 다음 레파토리는 뻔하지요. ‘싸가지가 있네 없네, 가정교육이 어쩌구저쩌구’ 하다가 급기야 ‘부모’ 욕 비스무리한 것이 나오면, 여태 효도도 제대로 않고 살던 사람이 갑자기 효자 ‘한석봉’으로 ‘빙의’를 해서는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점입가경으로 빠집니다.

“너 나이 몇이야?”, 너무나도 한국적인 이 ‘선전포고’가 가끔 예기치 못한 위기를 초래하게 되는데, 그것은 상대방이 나보다 한 두 살 더 높은 숫자를 말할 때입니다. 하지만 당황하지 마십시오. 그 때 쓰는 뻔한 레시피가 있습니다.    

“사실 내 호적이 늦게 올라가서 그렇타!” 아... 옛날에는 뭐 그렇게 부모님들이 죄다 늦게 호적을 올렸답니까? 왜 그렇게 제때에 호적 올렸다는 사람은 없는건지, 여하튼 확인 할 수 없는 나이 싸움은 밑도 끝도 없는 ‘싸가지’ 논쟁으로 얼추 막을 내립니다.

부모님들께서 호적에 늦게 올린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내가 태어난 것은 모월모시였습니다. 아무도 몰랐지요. 하지만 세상이 나라는 한 인간의 탄생을 알아들은 것은 아버지가 막걸리 한 사발 거나하게 하신 다음 읍내 면사무소 직원의 도장을 콱 박은 그 날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세상에 공식적으로 드러난, 나의 ‘공현’입니다.

장황했네요. ‘공현’이라는 말뜻이 그렇습니다. 공적인 현현, 드러남을 기리는 날이지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존재로 세상을 향한 공식적 드러남을 기념합니다. 왜지요?

사실 예수님께서 언제 어떻게 탄생하셨는지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비록 성경에 마굿간이 나오고 목동과 동방박사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그것은 탄생에 관한 ‘사실’을 전달해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지니신 인간 구원에 대한 ‘믿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음을 우리들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가장 낮고 힘없는 존재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
하느님의 구원 소식을 알아들은 이들은 높고 잘난 사람들이 아니라
길거리 인생들과 볼품없는 사람들,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한 가련한 이들에 의해
하느님의 구원은 이 세상에서 시작되었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
복음의 목적이었음을 감안할 때,
우리의 시선은 어떤 식으로 존재했을 탄생의 장치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향해 드러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에 관하여 집중하라는 소리지요.  

하느님은 동방의 박사들에 의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주님 공현 축일의 옛날 말, ‘삼왕래조三王來朝’, ‘동방의 세 왕이 구세주 탄생의 별을 보고 구유에 찾아와 경배하였고, 그들의 이름은 ‘가스발’, ‘발타살’, ‘멜키올’......

그래서, 미국은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독일에서는 아직도 주님 공현 대축일날 아이들이 집집마다 찾아와 방문하면서 사탕을 주고 문에다가는 그 해의 년도와 동방박사의 이름을 뜻하는 C, B, M 이니셜을 대문에 적어놓고 아기 예수의 방문이 있었던 집을 표하는 풍속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그 이름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동방의 박사가 셋으로 유추한 까닭도, 구유의 예수님께 놓인 선물이 세 가지였음으로 세 사람이었으리라 추정했던 것이고, 아울러 시편 72편 10절에 ‘섬나라 임금들이 예물을 가져오고’라는 대목을 근거로 6세기에 이르러 세 사람의 이름이 오리게네스Origenes에 의해 언급되면서부터 전해지게 된 하나의 ‘전설’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따지고보면 주님 공현 대축일의 복음으로 드러나는 사실은 삼왕의 이름도 아니고 그들이 준비했다는 선물의 의미도 아닙니다. 오히려 공현으로 인해 드러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 숨은 생각>들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동방 곧 이교의 사람들조차 메시아를 간절히 찾고 있지만 정작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은 메시아를 찾지도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를 죽이려는 그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냅니다. 공현으로 인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가 드러나자 이를 진리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적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략과 술수를 아끼지 않지요

그런 그들이기 때문에 들은 박사들이 말없이 돌아가자 분개하며 그 일대의 사내아이들을 죽이는 만행을 자행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공현, 하느님의 일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했던 사람들은 그 시대나 지금이나 똑같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드러남은 시므온의 예언처럼 이 세상 사람들의 ‘숨은 생각들을 드러나게’(루카 2,35) 하십니다. 이것이 공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서 55장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 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실천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이사 55,10-11)

그분은 끝내 당신이 이루시고자 하는 사명을 기어이 인간 세상 속에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거스르고 이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서도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 하십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요. 하느님께서는 나에 대하여 아주 구체적인 당신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나를 차지하고 싶어 하시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해야할 것은 바로 나에 대하여 가지고 계시는 하느님의 뜻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것이 공현의 핵심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 땅에 드러내는 일. 진리와 자유와 평화에 관하여!

내 성질이 아닙니다. 내가 평생 살아온 고집도 아닙니다. 똑똑하고 잘 나서 세상을 잘 살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나를 통하여 얼마나 당신의 뜻이 이 세상에 드러났는가! 이것 뿐입니다.

이민 생활이 그렇습니다. 손해 보지 않아야 합니다. 손해 보기 위해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기득권 세력들에게서 받는 부당과 불합리에 대하여 예민해야 합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면 내 소리를 크게 내야 하는 법을 우리는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래서 이민생활자 중에 안 똑똑한 사람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다 똑똑하고 잘났고 자기주장이 강합니다. 당연한 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남의 나라 땅에서 이만큼 이루고 살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러다보니, 서로 다칩니다. 많이 다칩니다. 끝까지 자기 말은 다 쏟아내야 하고 자기 생각은 다 옳아야 합니다. 그게 존중 받은 것이라고 하지만 상대방은요? 안중에 없습니다. 무참해질 수 밖에 없지요.  

따지고보면 별 것도 아닌데, 그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죽어라 싸우다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게 그럴 일이야?” 제가 독일에 살 때 한국 할머니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 중에 하나입니다. “이게 그럴 일입니까?”

우리가 언성을 높여야 할 것은 오직 하느님 뜻 아니던가요? 그것 말고 나머지는 저에게 맡겨주세요. 여러분들은 그저 남은 여생 내가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 인생 안에 이룰 수 있을까! 그거 하시기에도 바쁘지 않습니까?  
  
고작 별을 보고서도 길을 나선 사람들이 있다지 않습니까? 겨우 별자리 하나. 그것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뜻을 묻고 길을 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안 합니까? 이렇게 귀한 미사에 와서, 평생을 기도하고 숱하게 성체를 모시면서도 우리. 이 한 생이 하느님 앞에서 무엇을 드러낸 인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어야 안되겠습니까? 안그렇습니까?

부디, 마음들을 뚫으십시오. 그래야 살 것입니다. 막힌 마음이 있다면, 이유 필요없습니다. 모든 이유는 변명이고 변명은 구차한 겁니다. 당장 뚫으십시오. 그래야 하느님도 살 것입니다. 닫히고 막힌 그 마음들이 결국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숱한 아이들만 죽였음을! 기억합시다.

나를 드러내기 보다는 우리 안에 감추어져 계신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 이것에 이 공동체가 집중할 때, 저는 구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가 풍성하게 드러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멘.

아눈 신부님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신부님의 호탕한 목소리가 그리운 강론입니다.
"나를 드러내기 보다는 우리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을 드러 내는것! "이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이 늦은 나이에 데레사 땜시 자모 회장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꼭 명심 해야 할 말씀이라 맘 속에 담아 갑니다.)
  2019/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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