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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2019-02-11 02:45:34, Hit : 326)
<돌봄> 연중 제5주일 성 미카엘 성당

<연중 제5주일 성 미카엘 성당>

(INTRO)
하느님께서는 대단히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대한 저마다의 응답을 각자는 살고 있는 것이지요.
생명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으라 명하셨고, 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살아야만 합니다.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고 싶습니다.
저의 생명. 그리고 그대들의 생명.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생명들이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이 미사를 봉헌하겠습니다.
잠시 침묵으로 저마다의 부르심으로 이 미사를 준비합시다.

(강론)

지난 주일에 어느 신자분께서 저에게 그러셨습니다.
“신부님. 살아있으니 만나는군요!”
예, 그 말씀이 맞습니다. 살아 있으니 이렇게 우리는 만날 수 있습니다.
그저 그것이 고맙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시느라 애쓰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무리 늙고 병들고 아프더라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는 살아야 합니다.
살아도 그냥 살아지는 하루하루가 이제는 아닙니다.
살더라도 이제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이렇게 성당에서 한 번 이라도 얼굴 보고
한 번이라도 손 잡고 한 번 이라도 인사 나눌 수가 있습니다.
남은 인생, 그렇습니다.
끝까지 돌보며 우리는 살 것입니다.

함민복이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짧은 시를 썼습니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었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함민복, 성선설)

그렇습니다.
돌보아주셨기에 살 수가 있었습니다.
제 잘나서 살 적엔 돌보아 주신 것 잊고 살았지요.
하지만 짐승도 품어주어야 새끼가 눈을 뜨는 법이고,
한 송이 꽃도 대지가 품어주시고 바람이 돌보아주시니
향기 틔움을 깨닫자 문득 부끄러워진 것입니다.
나를 품어주셨던 가슴과 손길과 땀 냄새를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보살핌 받기를 원합니다.
자기는 사랑받기를 원하고 자기는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서로가 서로를 돌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사목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일>이라고 말이지요.
목자가 양들을 돌보듯, 어미가 새끼를 돌보듯, 누군가의 수고를 짊어지는 일이고
누군가의 고생을 떠맡는 일이라고 말이지요.
비록 수고와 고생이 고통스럽긴 하더라도
그 고통이 있어야만 목자는 목자가 되는 법이고
부모는 부모가 되어가는 법이라고 말이지요.

돌보려고 하면 내가 더 잘나고 높아서 될 일이 아닙니다. 돌보는 일은 내가 그 사람 아래로 내려가는 일입니다. 그 마음이라야 참되게 돌볼 수 있습니다. 힘과 권력으로 돌보지 않습니다. 겸손과 헌신으로 돌보는 것이 진짜입니다.

돌보는 이들이 많을 때 공동체는 그야말로 살맛이 나고 살판이 됩니다. 모두가 돌봄을 받기만 바라고 남의 손만, 남이 먼저 다가오기만, 쭈빗거리고 있습니다. 할 것은 굼뜨면서 바라는 것만 넘쳐납니다. 그러면 어만 소리들이 나올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목자로 불리움을 받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바오로,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불리움을 받는 그들은 하나같이 스스로의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이사야는 그러지요.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하느님의 돌봄 앞에 섰을 때 인간이 보이는 가장 진솔한 모습은 바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일, 그대로입니다.  

바오로도 그렇게 말합니다. “저는 감히 사도로 불리울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칠삭둥이와도 같은 저를 하느님께서는 사도로 불러주셨습니다!”(1고린 15,8-9) 오늘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8,8)

그러나 하느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죄라는 약점'을 고스란히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죄인으로 고백하고 감히 사도로 불릴 자격조차 없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라고 부르십니다.

입이 더러운 사람이라던 이사야를 부르셨던 그 음성으로,
교회를 박해한 자격조차 없는 칠삭둥이 바오로를 부르셨던 그 초대로서,
스스로 조아려 죄인임을 밝히는 베드로를 일으키시던 그 손길로,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도 그들처럼 바꾸어주십니다.

자릿 싸움을 벌이던 이들이 나서서 섬기는 이들로 바꾸십니다.
시기하던 이들을 봉사하는 이들로 바꾸십니다.
교만하던 이들을 거꾸로 매달리게 하지고,
살려고 발버둥치던 이들을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일꾼으로 바꾸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그들의 본성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채우십니다.
내가 미련을 가졌던 이 세상과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천상의 것으로 그분이 채우십니다.

구원 받을 수 없던 목숨을 구원으로 채우시고,
용서 받을 수 없는 인생을 용서로 갚으십니다.
감히 나의 것이라 내세울 수 없는 것들조차,
죄를 보지 않으시고 '선'을 먼저 보아주시고,
결과가 아니라 연약한 '의지'을 먼저 보아주시고,
번번이 같은 죄 짓고 넘어질지라도 당신께 품었던 그 첫 번째 '원의'를 먼저 보심으로서
우리의 본성을 다시 바꾸어주시고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였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시 위하여 부르셨습니다.
그저 이 한 인생 잘 살고 그만인 정도로
험난한 인생 마음이라도 편하게 살, 그 정도로 만들고자 하심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줄이 하느님 당신의 나라에까지 당도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물을 버렸을 뿐인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고,
배를 버렸을 뿐인 베드로에게 교회의 반석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약속의 '수혜자'들입니다.

신앙의 '본전생각'으로라도 이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 만큼의,
밑천, 본전을 많이 만드십시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정도의 신앙은 하지마십시오.
그 정도의 신앙은 결코 우리를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최소한 하느님이 나에게 없으면 안 되는 구원의 주님이 될려면,
그렇게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시려면,
점검하십시오.

<나는 하느님 때문에 무엇을 버리고 있는 사람입니까?>
하느님 때문에 포기하는 그것만큼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버리는 그 중요함만큼 하느님은 나에게 중요한 분이십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이 중요한 존재이기를.
하느님에게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기억만 돌려드리지요. 2012년도에 저는 여러분들과 상임위원회 피정을 가졌습니다. 그 때 제가 이렇게 물었었지요. 서로 돌보기 위해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 때 여러분들이 저에게 했던 대답입니다.

“부정적인 말, 비협조적인 말, 비판적인 말, 방관자적인 말, 옹고집스런 말을 버리자!”
“‘뭐씩이나’ 하는 사람이, 뭐까지 받았다는 사람이, 이름을 내세워 비난하는 말”
“부정적인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말, 시기와 질투의 말, 교만의 말을 버려야 한다.”
“곧바로 반박하는 말, 잘난 척 내세우는 말”
“저 사람은 먹을 때만 오는군, 일은 안하는군, 저 사람은 음식 한 번 안해오는군.”

여러분 스스로가 저에게 하신 말씀들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들과 다시 피정하기 위해 석달 뒤에 찾아뵙겠습니다. 우리들 안에 쉬고 있는 교우들, 병고를 겪는 교우들, 상처받은 교우들, 소외되어 있는 형제자매들, 더 많이 찾아가 돌보아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일으켜주십시오. 그리고 그 때에는 그분 한 분 한 분, 우리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임을 일깨워주십시오. 더 많은 형제자매들과 꼭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기도하겠습니다.

편히 쉬다 갑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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