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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2020-04-09 18:27:30, Hit : 184)
<성주간 빠스카 성삼일> 성목요일 스스예수 수녀회

<주님 만찬 성목요일>

(INTRO)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죽음이 소멸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의 생명은 되찾았으니, 성삼일이야말로 전례의 정점으로 빛난다.” 가톨릭 전례예식서의 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의 개별적 죽음으로 끝맺지 아니하고, 그 속에 침잠된 내 생명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들이요,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하여 구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죽음과 생명이 교환되고, 저주와 축복이, 땅과 하늘이 교환됨을 깨달았던 교부들은 일찍이 오늘부터 시작되는 이 삼일을 ‘거룩하다.’ 하였고, 거룩한 삼일의 첫날 저녁 주님 만찬 저녁미사를 봉헌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이 시간,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를 만날 것입니다. 성체성사의 진면목 하나, 성체성사를 위해 존재하는 사제라는 정체성 둘,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형제애라는 사랑의 진수 셋. 이 밤이 있기에 우리 가톨릭교회는 유대교와 다르며 개신교와도 다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방식과는 달리,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 스스로를 낮추어 종이 되는 자, 그들이 곧 하느님 나라의 방식에 더 가까운 자녀들임을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침묵으로 거룩한 삼일의 첫 번째 미사를 준비하도록 합시다.

(강론)

<성주간 빠스카 성삼일>

성주간 빠스카 성삼일 전례예식서에, 방금 봉독된 복음 뒤편에 이렇게 루브리까를 달아놓았습니다. “복음 선포 후에 사제는 강론을 한다. 강론에서 이 미사로 기념하는 중요한 신비들, 곧 성찬례와 사제직의 제정, 형제 사랑에 관한 주님의 계명을 풀이한다.” 전례서를 통틀어 오늘 이 미사의 강론을 어떻게 하라고 구체적으로 적시하는 대목은 이 미사가 유일합니다. 그만큼 오늘 이 미사를 통하여 행하는 성찬례의 의미가 막중하다는 것이, 사목적 이유로 선택할 수 있는 발씻김 예식이 갖는 상징성이 탁월하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인하여 제주 교구를 제외한 열 다섯 교구에서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를 부활 주간까지 중단시키고, 교황님조차도 홀로 성삼일 전례를 하시겠노라는 전언을 들었을 때, 저는 최소한 이곳에서 여러 수녀님들과 함께 하는 이 미사를 전 교구민을 기억하며, 어쩌면 우리보다도 더 이 미사를 간절히 원하고 있을 신자들을 대신하여, 가능한 성삼일 전례서가 요청하는 그대로를 최대한 반영하고 싶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공히 등장하는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먹으라고, 이것은 나의 몸이라고, 스스로 밥이 되시길 마다하지 않으신 그 장면을, 유독 요한복음만은 적시하지 않습니다. 그 장면을 통으로 덜어내버리고, 대신에 요한복음사가는 그 자리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예수님의 모습을 고스란히 삽입시킵니다. 성경의 편작 연대를 기준을 보았을 때 공관복음에 비해 가장 늦게 저술된 것이 확실시되는 요한복음사가 입장에서 기존 공동체에서 초록이 정리된 세 복음서들에 대하여 익히 들었을 것이고 그 내용도 꿰뚫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요한복음 사가는 예수님 사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체성사의 대목을 과감히 삭제하고 그 자리에 발씻김의 장면을 삽입시켰을까요? 적어도 요한의 판단은 그랬을 것입니다. 몸을 내어준다는 것.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시고 떠나시던 그 밤, 예수께서 쏟아내신 피와 살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겠지요! 예수의 몸과 피를 받아 먹는 행위의 핵심은 바로 내가 형제들의 종이 되겠다는 것. 성체성사는 바로 내 살을 내어놓고 내 피를 내어놓겠다는 결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큰 깨달음을 더욱 극적으로 전달하고 싶었으리라 생각해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습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쏟아 내어주신 이 성찬의 빵에 가중된 상징성이 인간 이성으로 쉽게 이해 가능한 것도 아니거니와, 유쾌하거나 즐거운 행위이지도 못했기에, 때로는 성체에 대한 지나친 과장이 부담스러웠고, 예식은 해가 거듭될수록 진부했졌으며, 아무리 먹었으나 무엇 하나 제대로 바꾸지 못한 채 여전히 어두움을 답습하는 나의 삶은 적지 않은 실망감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자문하였지요. 과연 거룩하다는 성체. 이것이 과연 나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느냐? 아니 더 본질적으로 도대체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이냐?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청결한 것? 희생하고 봉사하며 자선을 베푸는 것? 아니면 기도하고 친교하며 말씀을 나누는 것? 그러면 우리는 거룩하게 되는 것인가? 더 솔직히는, 진정으로 우리가 종교라는 행위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냐?

많은 경우 종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방식과는 다른 세계관 속으로 ‘건너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속됨에서 거룩함으로, 부정한 것에서 정한 것으로, 부패되는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단죄에서 사랑으로, 종교의 핵심은 ‘건너가는 것’이고, 그것이 모든 종교에서 지향하는 ‘빠스카’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건너감’으로서 완전히 빠져나가 완전히 새로운 상태로 진입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불가하다는 것이지요. 세례는 받았으되 언제나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본성. 성체는 모셨으되 또다시 욕망으로 덮여버리는 타성. 고백은 했으되 족쇄처럼 또 다시 감금당하고 마는 지독한 관성.

그것 때문에 주저앉습니다. 그렇게 이어지던 밤입니다. 어디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하나요? 이미 스승께서 죽음의 어둠에서 생명의 빛으로 건너가신 이 성삼일을 되풀이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금 그분이 이 밤에 행하셨던 일들 속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 요한복음 13장. 발을 씻기시는 그 장면. 살의 의미가 무엇이고 당신이 흘리신다는 피가 어떤 것인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는,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정화>가 머릿 속에 떠오릅니다.  

그간 사람들에게 정화라는 종교적 가치는, 정결, 윤리 혹은 도덕적 무장의 강화를 통하여 달성하고자 했고 그것이 마치 그리스도교의 본질인냥 답보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가 단지 사람들을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무장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완수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빛이신 하느님 앞에 단독자로 선 인간은 스스로의 의로움과 깨끗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서 구원 받는다고 교회는 고백합니다. 우리를 정화시키는 것은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인간 스스로의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신 손수 사람의 마음을 여시고 씻기고자 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 영을 통하여 인간 안에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심으로써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직 우리 자신이 의롭고 당당하고 떳떳한 것을 더 중하게 여깁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나는 문제없고 나는 죄 없음에 더 당당해 합니다. 내가 만들고 내가 쌓고 내가 이루어 온 것을 내세워 나의 죄는 하찮은 것으로 간주하고 나의 어둠과 나의 독선은 얼마든지 합리화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무수한 희생 제사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도 정작 우리들 자신이 인간을 씻겨주시기 위하여 종의 모습을 취하신 하느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군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저는 안 해도 되겠습니다!” 베드로의 답변이 그닥 어렵지 않습니다.

정화는 여러분,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정화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사랑을 내가 방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화는 여러분, 끝까지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전제되었을 때 우리는 참되게 건너갈 수 있습니다. 저 십자가의 방식, 저 십자가를 통하여 이르게 될 구원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화는 빠스카의 첫 번째 관문입니다. 지으신 분이 씻겨주십니다. 씻겨주신 분이 당신의 생명으로 다시 먹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느님 당신께 맞갖게 되도록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뵙는 것. 하느님 그분의 몸 안에 완전하게 통합되는 것.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현존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정화이자 성화이자 거룩함입니다.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나를 당신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나보다 더 낮은 모습으로 오시어 내 모든 더러움을 품으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이 바로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이 밤 우리는 단순히, ‘희생’이니 ‘극기’니 혹은 ‘봉사’나 ‘섬김’ 따위의 인간 주도적 언어들이 지니고 있는 자기만족을 버리고, 발 앞에 무릎 꿇은 이 사랑의 맨 얼굴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나도록 합시다. 그는 죽기 전 제자들의 발을 씻겼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그들 앞에 종처럼 엎드려 진정으로 이들이 깨끗한 마음이 되기를 바랬습니다.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 말입니다.
믿음으로 가득 찬 마음 말입니다.
하느님으로 가득 찬 마음 말입니다.

그 마음이야말로 깨끗한 마음이고, 그 마음이야말로 거룩한 마음이며, 그 마음이야말로 생명의 마음입니다. 번번이 실패하고 자꾸만 무너지더라도 새로운 마음을 갖는 일, 이것이 새로운 계명의 전부입니다.

사제는 한 사람의 발을 씻기울 뿐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전체 공동체를 씻기우십니다. 가장 낮은 자세로 사랑하기를 결행하는 마음. 그 마음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 뭐라하는지 그거 마음에 넣지 마시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 하시는지 그 사랑만을 마음속에 가득 채우십시오. 그래야 자유로울 수 있고 그래야 부드러울 수 있고 그래야 너그러울 수 있습니다.

억지로 해야 하는 신앙은 없습니다. 신앙을 굴레나 종속으로 만들지 맙시다. 사랑을 모르고 마음을 모르면 법만 남고 의무만 남고 판단만 남습니다.

새로운 마음을 가집시다. 이것이 의식 없이 행하는 수백 번의 기도보다 낫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빠져봅시다. 이것이 인간이 주도하는 모든 선행과 업적보다 훨씬 낫습니다.

오늘로부터 빠스카가 시작됩니다. 건너가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건너가면 되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으로 가득 찬다면 보일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이 앞장 서 가신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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