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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2011-11-05 03:34:14, Hit : 1955)
<그러는 거 아니다!>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INTRO)

“당신은 설교하고 가르치는 임무를 지니고 있습니까? 이 임무를 잘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배우는데에 힘쓰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의 생활과 행동 자체가 설교가 되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당신이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당신의 말을 비웃고 고개를 내젓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말은 600여년전 밀라노의 주교였던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가 마지막 교구회의에서 하신 강론이었습니다. 비단 설교와 강론을 맡은 사제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신앙도 그렇고 기도도 그렇습니다. 우리 삶이 이것과 동떨어지는 순간, 그것이 강론이 되었든 신앙이 되었든 기도가 되었든 이는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대가 사제인지 수도자인지 신앙인인지, 그대가 무엇이었는지, 묻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대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만 그분은 질문하실 테지요. 말과 삶이 ‘함께’ 살았는지, 머리와 가슴이 같이 ‘동행’하였는지, 사랑과 희생이 끝내 당신의 인생에서 어떻게 ‘발화’하였는지만을 물을 것입니다.

잠시 침묵 중에서 이 미사를 준비합시다.

(강론)

<그러는 거 아니다!>

예수회 수사님들이 1960년 한국에서 예수회의 교육 이념에 따라 설립한 대학이 서강대학교였고, 이 대학의 초대 설립자이자 학장은 K. 에드워드 킬로렌 신부님이었는데 이분은 외국인 최초로 ‘길로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인으로 귀화한 첫 번째 인사였고 한국말도 유창하게 잘해 독재치하의 한국에서 신문 기고와 강연으로 큰 존경을 받던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이름은 더 이상 서강대학교 설립자의 명단에서 찾아볼 수가 없어졌습니다.

조안이라는 당시 스물 세 살짜리 처녀와 사랑에 빠진 그분은 갖은 권고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정신병원에 감금시키려는 예수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교황청에 서품무효소송을 제기한 후 끝내 결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조안에게 보낸 편지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파스테르타크의 '닥터 지바고'를 읽다가 조안 생각을 했어요. '인간은 생을 살려고 태어난 것이지 생을 준비하려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이 얼마나 옳은 말입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회의하고 두려워하고 주저하고 관찰만 하다가 세월을 낭비해 버립니다. 과오를 저지를 까봐 두려워 아예 아무 것도 안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양초의 두 끝을 다 태울까 두려워 결국엔 성냥불을 긋는 것조차 포기해 버리고 말지요. 이런 '하지 말라'의 연속은 삶의 환희와 모험심을 없애버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을 했다가 잃는 것이 아예 사랑을 안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암흑을 저주하는 것보다는 하나의 촛불을 켜는 것이, 조안 같은 여인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 가만히 앉아서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회의하며 보내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 생을 살아가는 방법입니까?

날이 갈수록, 생에 대한 나의 철학은 더욱 확고해져 갑니다. 살고 사랑하고 실험하고 모험하고 모든 일에 긍정적으로 'YES!'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천주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뜻에 맞게 이 생을 살아가는 바른길이 아니겠어요? 조안, 우리 함께 열심히, 후회 없이 살아갑시다.

1967년 1월 2일 09:00 PM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하신 신부님은 아내가 비즈니스맨으로 큰 성공을 거두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며 가족의 애도 속에 20여년전 선종하셨습니다.

과연 길로연 신부님의 선택에 대하여 세상이 바라보는 잣대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생애를 어떻게 ‘정의’했는가의 문제입니다. 사제로서 그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행복, 자신의 인생이 결코 세상 사람들이 기준이나 시선에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님을 확신했습니다.

인생은 결코 무언가를 연습하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 매사가 심각하고 어렵고 두려움으로만 받아들인다면 결국 우리는 ‘어두운 현재’를 살 수 밖에 없으리라는 것! 삶은 결코 고행이 아니요 고뇌도 아니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삶을 주신 것은 향유하고 행복하라고 주신 것이라 정의하고 믿었기에 모든 편견과 두려움을 뚫고 새로운 삶을 향해 걸음 내딛었습니다.

정직하게 인생을 바라보기! 여기에 ‘꼼수’는 통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 꼼수를 씁니까?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꼼수를 쓰고, 세상의 이목 때문에 꼼수를 쓰며, 자기는 불편해지지 않으려고, 결국 정직보다는 욕심을 채우려 꼼수를 씁니다.

인간이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데에는 얼마나 영악스러운지 모릅니다. 작은 이익에도 몸이 달뜹니다. 태생이 이기적인 존재인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 이기주의를 채우기 위해 사단을 내면서도 언제 단 한 번도 행복하다 소리도 못한 채 허망하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내 이름 석 자 어디 올려놓는 그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일까요? 내 자존심 죽을 때까지 잘 지키고, 남들 눈에 행복하다 비치며, 적당한 삶의 틀 속에 안락하게 지낼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남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인생과 함께 살아주었던  좋은 사람이 없다면 그 세월 자체가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업적이라는 거, 재산이라는 거, 명예라는 거 별 것이 아닙니다. 좋은 사람 만나고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 되어주는 거! 이것이야말로 우리들 인생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좋은 사람’보단 ‘좋은 이익’을 위해 할 짓 못할 짓 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만큼이나, 우리 영신의 이익을 위하여 세상 사람들처럼 그렇게 할 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남들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고작 썩어 없어질 그걸 얻겠다고 오만 짓 다하는 것처럼, 우리도 영적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그만큼의 열의를 꼼수부리지 말고 나서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핑계꺼리가 많으면 안 됩니다. 왜 기도 못합니까? 왜 사랑과 용서를 못합니까? 왜 소공동체 봉사자라도 왜 그렇게 다들 못한다 소리만 하십니까?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안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고 은퇴를 하고 나서도 세상이 너무 분주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을 위해서는 갖은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하느님을 위해서는 자린고비 짓을 마다 않는  사람들이 어이 하느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온 인생을 셈할 생각이십니까?

한국 어느 식당에 이런 글귀가 붙어 있답니다. 밥 먹다가도 턱, 목에 걸린다는 이 글을 읽의며 우리 사는 모습과 우리 신앙의 이야기를 빗대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목은 <그러는 거 아니다!>입니다.

부모님의 크신 은혜 하늘같이 높으건만
청춘남녀 많은 중에 효자효부 없는 세상
시집가는 새악씨는 시부모를 싫어하고
장가드는 아들네는 살림나기 바쁘도다.

제자식이 장난치면 싱글벙글 웃으면서
부모님이 훈계하면 듣기 싫어 성을 내고
시끄러운 아이 소리 듣기 좋아 즐겨하며
부모님이 두말하면 잔소리냐 빈정된다.

제자식의 오줌 똥은 맨손으로 주무르나
부모님의 가래침은 더러워서 밥 못 먹고
고급과자 들고 와서 아이 손에 쥐어주나
부모 위해 고기 한 근 사올 줄은 모르도다.

개가 앓아 누우며는 가축병원 달려가나
늙은 부모 병이 나면 걱정근심 아니하네.
열 자식을 키운 부모 하나같이 키웠건만
열 자식은 한 부모를 한결같이 귀찮타네.

자식 위해 쓰는 돈은 계산 없이 쓰련만은
부모 위해 쓰는 돈은 계산하기 바쁘도다.
자식들을 데리고는 호화외식 잦건만은
늙은 부모 위해서는 외출할 줄 모르도다.

내 자식, 내 일과 상반된 부모 신세, 하느님의 처지가 이와 같지 않은가 살피니... 덜컥, 손에 쥔 밥숟갈이 민망해집니다. 아멘.

정경희 길로연 신부님과 조안리의 이야기는 20여 년 전에 책으로 읽었답니다
그때 그 책을 읽으면서 두 분의 사랑이 아름답게 느껴졌던 기억이 나네요
비록 사제복은 벗으셨어도 늘 하느님과 함께 사시고자 하셨던 길로연 신부님의 삶이 아주 인상적이었지요
제 생각에는 사제로 사느냐 평신도로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인데 ....

아래에 적힌 글을 읽으니 부모님께 대한 효심이 지극한 우리 프란치스코와 세실리아가 더 기특해 보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부모보다는 자식이 우선인데 이들은 부모님을 우선하며 살지요
두 분 부모님께서 90세, 82세 되시니 각각 병원에 입원해 계셔 안타까워 온갖 정성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에
하느님께서도 이뻐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1/11/05  
안토니오 아침 강론 작업에서 쇼킹한 경험 합니다. 그래서 제 댓글도 좀 늦습니다.
얼핏 신부님의 결혼 이야기 들은 적 있습니다만 그렇고 그런 스캔들 정도로 넘겼지요.
'킬로렌 신부' 검색에서 더 상세한 정보에 아침 나절 내내 충격에 빠집니다.
그 보수적인 교황청이 결국 결혼 허락했고 미국 한 성당에서 일체의 하객없이 결혼식 올렸다는 소식.
당시 스물셋의 나이로 26년 연상의 미국 수도회 신부와 겷혼 성공한 '조안 리'의 저서와 인터뷰에서 그녀의 당당함에 우선 놀랍니다.
길로연신부는 교구 소속 사제가 아니라 수도원 소속 신부라서 '장상의 허락'으로 결혼 가능하다는 것도 새로 알았네요.
사제 환속의 경우, 혼인성사나 관면혼배도 금지되고 그 자녀의 세례성사까지 금지한다네요.
'길로연신부'는 한국 가톨릭에서 금기시되는 단어 느낌도....

"...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삶을 주신 것은 향유하고 행복하라고 주신 것이라 정의하고 믿었기에 모든 편견과 두려움을 뚫고 새로운 삶을 향해 걸음 내딛었습니다."
조신부님의 이런 결론이... 자칫 교구에서 오해하여 예기치 못한 불상사 가져올까 두렵기도 합니다.
  201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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