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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2013-03-06 23:51:11, Hit : 1519)
<사막과 광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 정지원 신부 사순 특강 원고

<사순 특강 01>

정지원(테오필로, 의정부교구)신부님

인사말: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제가 부득이 한 사정으로 인해 여러분들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겪은 일들이 과연 어떤 의미일지 몰라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하여 잠자기도 어려웠고 원망이 들기도 하고 많이 복잡했습니다. 제가 어떤 말로 표현한다고 해도 다 표현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저에게 벌어진 상황들이 도대체가 이해가 되지 않아 홀로 피정을 하면서 묵상한 내용들을 사순 제 3주일을 여러분들과 미사를 봉헌하면서 특강 형식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물론 제가 하는 묵상형식이 이냐시오식 묵상이어서 지극히 개인적이기도 하겠지만 저를 위해 기도도 해 주시고 여러모로 아껴주신 데 대해 감사의 마음으로 기꺼이 나누려 합니다.

강론 주제: 사막과 광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

사막 또는 광야는 낯설고 생명보다는 죽음이 지배하고 있는 불모지의 땅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막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는 양식과 먹을 물이 없어서 죽는 경우보다 갑자기 내리는 강우로 홍수에 죽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비가 내리고 나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숱한 풀들이 자라납니다. 생명의 땅인 것입니다. 지친 이들과 동물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는 천국의 체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막은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고 뱀과 전갈의 독으로 인해 죽음에 노출되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 뜨거운 태양과 달리 밤이 되어 떨어지는 급격한 온도 차가 40도를 넘나드는 곳. 그렇기 때문에 절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며 누군가의 도움을 저 인간 깊숙한 밑바닥에서부터 처절하게 절실하게 청하게 되는 장소입니다.

이런 사막과 광야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제가 처음 본 광야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넘어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광야에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아카시아 종류인데 사막기후라 잎은 보통 아카시아가 아니라 가시처럼 가늡니다. 저는 몹시 흥분하여 창가 너머로 있는 나무들에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제가 서품을 받기 전에 피정을 하면서 피정 지도 신부님에게 얻은 한 장의 사진이 서품상본의 사진이 되었습니다. 척박하고 흙먼지만 날리는 광야에 심어진 한 그루 나무. 그 나무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걸어갔던 그 사막위에 있던 나무들이었습니다. 제가 왜 그 사막의 나무를 선택해 서품상본으로 사용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이 나무의 삶이 나의 삶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나무가 바로 내 앞에 저기 저렇게 펼쳐져 있다고 생각하니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호세아서 2, 16절인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서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처럼 광야에 끌렸을 수도 있습니다.

피정을 하면서 제가 선택했던 많은 성서 구절들 중 탈출기 3, 1-15, 1열왕 19, 3-21. 코헬렛 3, 1-15 을 이야기 하려합니다. 이 구절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제 삶, 사막이라는 공간에서의 체험, 위로의 장소로서 광야를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냐시오식 피정을 했기 때문에 묵상 안에서 묘사하는 부분들이 들어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코헬렛의 경우는 장면이 연상되는 것이 아니어서 제 마음안에 들리는 소리들을 적어보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성서를 가지고 계신 분들은 함께 따라 읽으시면서 들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1. 첫째로 탈출기 3, 1-15절인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모세는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권력을 지닌 자에서 졸지에 광야를 떠돌며 짐승과 노숙을 하게 되는 신세였습니다. 양들을 먹이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다녀야 하는 떠돌이. 한곳에 머무를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죽음도 다른 곳에서, 길 위에서 마쳐야 하는 자, 물에서 건져졌으나 산 위에서 인생을 마감해야 하는 자 모세. 그의 눈에 비친 양들의 눈도 몹시 슬프기도 합니다.

숫자를 세려고 했으나 어지러이 양들이 돌아다녀서 몇 마리인지 셀 수가 없었습니다. 몇 마리나 되는 양들을 모세는 데리고 다녔으려나. 서른 마리는 족히 넘었을 것입니다. 광야여서 풀을 따라 이리저리 다니다 산 쪽으로 가게 되는데 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광야를 거쳐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산이라는 호렙에 들어가는 것은 거기에 나무와 덤불이 있어서입니다. 하지만 먼저 양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광야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흙먼지와 따가운 햇살이 생명체를 덮고 말려 버리는 곳이고 전갈과 뱀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광야를 지나야 하는 운명일 지 모릅니다.

날은 조금씩 어둑해져서 양들과 함께 잠을 청할 때가 되는 곳인 산 입구에 다다랐습니다. 불 붙는 떨기에서 모세가 본 것은 천사일까, 아니면 불이 보이므로 천사의 날개로 알아본 것일까? 거룩한 곳, 처음 발을 딛는 곳에서는 지나온 흔적을 벗어 놓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신발은 소중하면서 지나쳐 온 흔적인 땅과 가장 마지막까지 접촉을 나누며 신체를 감싸고 있던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와서 만난 곳에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은 하느님께서 먼저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듣고 알았다 입니다. 신이 „나는 있는 자“ 라고 하는 것은 고통을 보고 듣고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스런 곳에 함께 있었다는 바로 그것이 징표입니다. 그 외에 어떤 징표가 있다는 것일까요? 어떻게 사람들이 있는 자 라고만 하면 알아듣겠습니까? 그것은 고통을 보고 듣고 알았다는 것, 함께 있었다는 것, 당신이 스스로 겪으셨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절대자가 보고 듣고 알았다는 것은 보고 듣고 아는 그 내용, 그 대상, 그것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이 고통과 하나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느님으로서 계시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우선은 광야를 지나야만 하느님의 신현에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2. 둘째로 열왕기 상권 19, 3-21절, 엘리야가 호렙산으로 가게 되는 과정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사제들과의 대결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여왕 이제벨의 살해의 위협에서 도망칩니다. 사실 죽음의 위협은 그 전이 더 심했을 터인데 그의 믿음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왜냐하면 야훼 하느님의 예언자는 다 죽고 자기 혼자서 그 많은 바알 사제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니 말입니다. 바알 사제들보다 보다 현실적이고 막강한 권력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더욱 더 엘리야가 죽음의 위협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도시와 떨어지고 권력자들의 힘이 덜 미칠 수 있는 광야로 나아갑니다. 그곳에서 누군가 올 것이라 생각되면 은폐물이 없을 테니 멀리서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싸리나무 아래에 있으면서 몸을 조금이라도 숨기며 한 숨 돌리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거기서 죽음을 기다리지만 죽음이 쉽사리 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모든 일을 다 했는데 죽음 앞에 놓인 처지여서 아무 것도 못 먹고 죽음만을 기다렸으나 죽고 싶었는데 죽음 대신 생명을 받습니다. 그것도 두 번을 천사가 깨웁니다. 천사가 깨웠으면 벌떡 일어났어야 했지만 죽음의 공포가 그를 당장에 일으켜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죽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라는 자포자기의 절망이 그를 죽음으로 끌고 가려고 하였습니다.

두 차례의 천사의 깨움은 그를 탈혼 상태처럼 이끌어 광야를 가로질러 밤낮 사십일을 걸어 호렙산으로 갑니다. 모세처럼 엘리야도 우선 죽음의 땅인 광야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죽음을 넘나드는 곳, 외로이 홀로 지나가야 하는 곳, 광야. 홀로 갈 수 없지만 주님이 함께 계셔서 가능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여전히 무서워 동굴에 있으니 두 번을 하느님께서 물으십니다. 엘리야야,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라고. 엘리야는 자신이 한 일을 하느님께서 알아달라고 하며 차라리 죽여달라고 합니다. 정말 과연 죽고 싶은 것일까요? 아니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죽음을 지나쳐 왔기 때문에 살려달라고 하는 청원입니다. 엘리야는 해야 할 일을 다 했으나 결과가 죽음에 쫓기게 되어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살고 싶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세와 같이 광야, 산, 부르심은 늘 언제나 작용하며 우선적으로 광야가 첫 걸음입니다. 죽으려고 가지만 오히려 다시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곳. 그곳이 사막이고 광야입니다.

3. 셋째로 코헬렛 3, 1-15 입니다. 1절의 말씀은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마지막 구절은 "있는 것은 이미 있었고 있을 것도 이미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라진 것을 찾아내신다". „Alles hat seine Stunde. Für jedes Geschehen unter dem Himmel gibt es eine bestimmte Zeit“.(1절) „Was auch immer geschehen ist, war schon vorher da, und was geschehen soll, ist schon geschehen und Gott wird das Verjagte wieder suchen.“(15절) 독일어 공동번역 성서는 조금 다르지만 의미는 상통합니다.  

떠날 때가 있으면 돌아갈 때가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저를 건드립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들도 어쩔 수 없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받은 상처들이 나를 화나게 하고 분노하게 하고 어이없게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나를 지배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피정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잠과 싸우지만 어느덧 잠이 아니라 고요해 질수록 마음속에 숨어있던 어두운 것들이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사탄의 방해라고도 할 수 있고 하나의 치유의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은 이런 모든 것들이 내 자신을 바로 보게 하고 투명하게 하는 일들을 방해합니다. 고요할수록 깊은 곳의 침전물들이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욥의 처지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욥처럼 의로운 사람도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이는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 않는가? 그러나 당당하게 하느님께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중에 가서야 하느님이 나타나셔서 그 의로움을 알아주시고 하느님인양 하느님을 변호하던 친구들이 벌을 받지 않는가? 솔직하게 탄원하는 것,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고 기도하는 자가 결국은 하느님께서 혼내시기도 하지만 더 칭찬하지 않는가? 그리고 결국 내 자신도 욥과 같은 가장 밑바닥 체험을 해 본 적이 있는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당하는 불행한 일과 황당한 일들을 당장 의미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저 시간이 지나고 어떻게 인생의 큰 궤적 안에 놓일지 바라볼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코헬렛 3장은 저에게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저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코헬렛의 언어가 어쩌면 냉소적이고 허무하고 어딘지 모르게 무감각한 구절들이지만 오히려 위로를 준다는 것을 이번에 다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행과 불행도 그냥 살아가면서 그저 지나가고 겪어내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과감히 말할 수 있는 것도 인간 스스로 어떤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벌어지는 일이 무엇인지 결코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있는 것은 이미 있었고 있을 것도 이미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라진 것을 찾아내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라진 것, 잃어버린 것, 잊혀진 것들을 찾아내신다는 코헬렛의 증언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억울한 사정, 오해와 편견 속에서도 그 진실한 사정을 찾아내신다는 하느님의 사랑이 이 얼마나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위로와 위안, 주시는 것들이 다 선물이고 은총입니다.

제가 억울하게 당한 일들에 상대방은 합리화하고 그 사람의 위치가 가진 힘으로 불의한 일들을 누를 수 있고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찾아내신다는 것이 그 얼마나 큰 위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만일 사막, 광야라는 어둡과 지치고 죽음과 같은 곳을 지나간다고 해서 다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인간이 지금 현재의 삶의 의미를 당장에 깨닫지 못하는 것은 숙명인가 봅니다. 그것은 하나의 비극이지만 절망에서도 빛나는 하나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죽음이 있지만 그 안에 빛나는 생명이 나타나는 곳이고 저주의 땅이기도 하지만 은총이 주어지는 곳입니다. 단지 우리 눈에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절실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곳이 광야이고 사막입니다. 그리스도교 인들에게 광야는 죽음이고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고 그곳을 통하지 않고는 거짓 신을 만나게 되는 영적체험의 장입니다. 인간은 결코 뒤를 동시에 돌아볼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몸과 고개를 돌려야 자신의 뒤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동물들은 정해진 틀에 살아가고 자신들의 의지라기 보다는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신의 의지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지만 뒤를 동시에 돌아 볼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이현주 목사님 책에서 본 글이 생각납니다. 어느 날 어떤 이가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이 살아 온 발자취를 보게 되었습니다. 좋은 길을 갈 때는 발자국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 하나는 자신의 것. 그러다가 사막의 길을 갈 때는 하나 밖에 없어서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예수님, 제가 행복했던 시간에는 함께 계시다가 어렵고 고통스럽고 죽을 만큼 힘든 시기에는 저만 홀로 가게 하시고 어디를 가신 겁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가장 어렵고 힘들었을 때 발자국이 하나 밖에 없는 이유는 네가 너무 힘들어해서 내가 업고 간 발자국이란다." 여러분들이 힘들고 고통 중에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업고 가신다는 사실을 상상해 보십시오.

사막을 걸어가는 여러분들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곁에는 적어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도 홀로 40일을 광야에 계셨다고 하지만 늘 하느님과 함께 하셨고 십자가는 그런 의미로 진정한 의미의 광야였습니다. 그 광야를 거쳐야 비로소 예수는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류시화 시인의 낙타의 생 이라는 시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낙타의 생 - 류시화

사막에 길게 드리워진
내 그림자
등에 난 혹을 보고 나서야
내가 낙타라는 걸 알았다
눈썹 밑에 서걱이는 모래를 보고서야
사막을 건너고 있음을 알았다
옹이처럼 변한 무릎을 만져 보고서야
무릎 기도 드릴 일 많았음을 알았다
많은 날을 밤에도 눕지 못했음을 알았다
자꾸 넘어지는 다리를 보고서야
세상의 벼랑 중에
마음의 벼랑이 가장 아득하다는 걸 알았다
혹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보고서야
무거운 생을 등에 지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사막을 건너왔음을 알았다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코헬렛을 통해서 사막과 광야의 의미에 대해서 바라봤습니다. 하느님께서 꾀어내어 사랑을 속삭여 주려는 곳이 사막이라는 것은 아이러니 한 일이지만 그곳을 통해서야 우리는 값싼 믿음이 아닌 값진 믿음,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좁은 길로 가라는 예수님 말씀이 사막의 길과 닿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모세와 엘리야, 세례자 요한과 예수를 그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광야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영성의 시작입니다. 거기가 새로운 부르심에 대해 응답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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