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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소리 님께서 남기신 글 (2004-04-16 20:21:25, Hit : 1661)
<물이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도다> 연중 제2주일

<물이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도다>

물로 술을 만들었다... 여기서 말하는 물은 무엇입니까? 성서적인 의미를 잠깐만 먼저 생각해볼까요? 여기서 말하는 물은 무엇입니까? 물은... 마치 지난 세례 축일 때 이렇게 설명드렸지요. 세례가 무엇이냐? 물 속 들어가 완전히 죽고, 다시금 일으켜 세워지는 것, 완전히 물 속에서 옛 삶과 옛 죄를 모조리 죽여버리고 난 다음 새로이 얻게되는 영원한 생명... 그것이 바로 세례이다. 라고 했습니다. 주님 세례축일의 연장 선상에서 볼 때, 물은 바로 죽음을 드러냅니다. 옛 삶, 옛 죄, 곧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찬 무의미한 생명이 바로 물입니다.  

물이 죽음이라면 물이 술이 되었다.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 라고 할 때, 이 술, 포도주는 무엇일까요? 그렇지요. 영원한 생명이지요. 죽음이었던 물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되살아났음을 오늘 가나의 혼인잔치라는 공간을 통해 요한은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물 밖에 남지 않은 "잔칫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 잔치에 술이 떨어졌습니다. 술이 떨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다. 이제 판이 끝났다는 소립니다. 앙꼬 없는 진빵이 되었다는 소립니다. 그럼 무엇이 앙꼬 없는 진빵이 되었단 말씀이냐...

초세기 교회에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는 바로 유대교로부터 떨어져 나와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교와 관계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눈으로 볼 때, 유대교는 그야말로 신명을 잃고 흥을 잃어버린 헛 잔칫상이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유대교는 이집트 탈출의 체험에서부터 기원하는 종교입니다.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용서와 자비, 사랑과 정의를 체험한 종교가 바로 유대교입니다. 그런 유대교가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 사회의 전반을 지배하는 권력구조로 자리하면서 어떻게 변질됩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편가르기 시작합니다. 유대교에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율법만이 남았습니다. 율법을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하느님의 자녀이냐 아니면 죄인이냐가 구분되어졌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사라지고 법을 지키고 있는가 아닌가를 심판하는 율사들만 남았습니다.

또 유대교에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제사만이 남았습니다. 정결례를 지내고 속죄제를 지내고 숱하게 바쳐야 하는 제사만이 남았습니다. 인간의 정의와 공정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사라지고 제대로 잘 바치는가 아닌가를 심판하는 제관들만이 남은 것입니다.

이제 유대교는 지키고 바쳐야 하는 의무만이 남은 것입니다. 지키고 바쳐서 얻어내야 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지키고 바쳐서 얻어내는 것은 종들의 행위입니다. 종들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이러한 종들의 신앙을 요구하였습니다. 지키고 바쳐야 하느님의 은총을 얻을 것이다. 그래야만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종들의 신앙은 흥이 없습니다.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신명이 끊어졌고 살 맛이 없는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판이 무엇입니까? 바로 술이 떨어진 이 잔칫상입니다. 마치 유대교는 술이 떨어져버린 신명과 기쁨이 사라진 잔칫상이었습니다.

이 잔칫상에 누가 술을 만들어주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미 판이 끝나버린 그 잔칫상에 새로운 술로서 새로운 잔치를 벌이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이분은 급기야 당신 몸소 십자가의 제사에서 흘리신 피로 영원한 제사의 피로 당신 스스로 그 술이 되신 분이십니다.  

오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이미 판이 끝나버린 유대교, 신명이 끊어져버린 유대교에서부터 예수님은 새로운 술을 만드시고 당신 스스로 새로운 피를 흘려 그 신명을 그리스도교를 통해 이어가심을 요한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이 떨어진 혼인잔치를 오늘 1독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여자라 하지 아니하고 너의 땅을 소박데기라 하지 아니하리라. 이제는 너를 사랑하는 나의 임이라, 너의 땅을 내 아내라 부르리라.

자... 이 정도 기본 이해를 깔아놓고 오늘 복음을 다시 만나봅시다. 술 없는 잔칫집... 커피가 떨어진 다방입니다. 성체가 없는 감실입니다. 잔치판이 끝나버릴 순간이자, 신명이 끝나버릴 이 순간에, 그 누구도 적당한 대책을 갖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단 한 사람. 마리아는 한가지의 대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일한 도움, 유일한 대책인 아들 예수를 떠올립니다.

"어머니, 그것이 나와 어머니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공관 복음은 좀 점잔히 이렇게 표현하지만, 좀더 원문에 가까운 번역은 이렇습니다. "여인이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는 단지 예수 자신의 신원에 대한 고백이자 확인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칫 어머니의 청함에 대한 경멸이나 무시의 뜻으로 오해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의 믿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만 하여라!" 하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물이 술이 되는 힘이 시작됩니다. 사실 술맛의 반은 물맛이란 이야기처럼, 모든 술은 물이 변화한 것입니다. 단지 물이 술이 되기 위해 걸리는 우리의 시간이, 시간의 주인 앞에서 단축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사건, 예수님에게 있어 물이 술이 되기 위한 효모는, 누룩은 바로 마리아의 신앙이었습니다. 믿음이었습니다.

물이 술이 되었다. 이는 단지 음주가무를 위해 배려하시는 하느님의 신기한 이적행위가 아님을 알기에 우리가 청해야 할 바 역시 물을 가득 떠놓고 술로 만들어 주십시오. 기도하는 것이 아님도 압니다.

물이 술이 되었다. 단지 준비한 것이라고는 물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술로 바꾸어 주시는 힘. 단지 준비한 것이라고는 부족함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충만함으로 바꾸어 주시는 힘.

단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마음 가득 미움뿐이지만, 어느새 그것을 사랑으로, 인내로 바꾸어 주시는 힘. 철천지 원수같던 사람이, 가족이, 하느님 때문에, 믿음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해야만 하는 형제로 바꾸어 주시는 힘. 을 믿는 우리는, 아는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을 체험하고 사는 우리는 하느님을 믿으면서부터 시작된 나의 변화가 바로 오늘 진미의 향을 풍기는 이 좋은 포도주들임을 확인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나의 독에 무엇이 들었습니까? 하느님을 만났는데도 여전히 용서하지 못할 미움이 고여 있습니까? 하느님 앞에서만 잠깐 화해하고 마는 이름들이 고여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바로 새 포도주들이어야 합니다. 여태 물이어서는 안됩니다. 독에 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물 썩은 내, 하수구 가득한 그 냄새가 혹시 나의 독에서 슬슬 새어나오진 않는지 나의 독을 들여다보아야 하겠습니다. 여태 새 포도주이지 못한 우리의 잔치는 끝장나버릴 위험에 직면한 빚잔치에 불과합니다.

아직 고인 물로 남아있는 우리의 인생은 살아도 사는 맛이 없는, 왜 살아야 하는데, 별의 별 일들로 편두통이 가실 날 없는 앙꼬 없는 인생입니다. 우리네 주인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삶이라 부르는 것들에서 얼마나 많이 나의 변화를 체험하고 살았는지, 하느님을 만나고, 그 만남 덕분에 다시 숨이 이어져 살 수 있었는지, 우리의 흥을, 우리의 살맛을, 산다는 일과 죽는 다는 일 모두의 의미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시는 그 힘을 우리는 이 미사시간 청해야 합니다.

신학교에서 기말고사를 쳤습니다. 시험문제는 오늘 이 복음 내용, 물로서 포도주를 만든 이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기술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신학생들이 아는 것 모르는 것 죄다 끌어 붙여 그리스도론적, 교의적 해답을 작성해 나가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신학생은 한참을 눈을 감고 있다 물끄러미 한 줄의 답을 작성하여 제일 먼저 교수 신부님께 제출하고 퇴장하였습니다. 그 답안지를 읽은 교수 신부님은 주저 없이 그 학생의 답지에 A+를 채점하셨습니다.  

시험 후 교수 신부님은 그 신학생의 답안지를 칠판에 계시하셨습니다.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졌도다."

우리도 우리 주인 하느님을 만나면 홍조띤 얼굴이고 싶습니다. 주인을 만나 얼굴이 붉어져 술이 되어버린 물처럼, 자기가 무엇으로 쓰여야 할 지를 깨달았던 물처럼, 홍조 띤 포도향이고 싶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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