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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homepage] (2010-06-23 19:32:15, Hit : 739)
<돼지 목에 진주> ::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H3>돼지 목에 진주</H3>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백]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 또는
[홍]성 요한 피셔 주교와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① 2열왕 19,9ㄴ-11.14-21.31-35ㄱ.36 ㉥ 마태 7,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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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세기 말, 한동안 평화와 안정 속에 있던 이스라엘이 다시금 전쟁의 소용돌이에 파묻히게 됩니다. 특히 북부의 이스라엘은 예후왕조가 멸망한 이후로 피가 다른  피를 부르는 쿠테타의 연속으로 국력이 쇠진되고, 남부의 유다 역시 이러한 위기 속에서 형제와도 같았던 이스라엘에 칼을 겨누었던 아시리아에 빌붙어 살 길을 도모합니다. 기원전 722년 북부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멸망한 이후에도 살아남은 유다는 아시리아에 종속되어 반식민지와 같은 상태로 근근히 조공을 바침으로써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즈키아 왕 시대에 서서히 아시리아의 간섭으로부터 자주권을 회복하고자하는 움직임이 시작되던 찰나 이를 눈치챈 아시리아의 침공에 맞닥뜨립니다. 센나케립의 아시리아 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유다 왕국을 무너뜨리기 일보 직전 아시리아는 좁혀가던 포위망을 풀고 니니베로 회군을 결정합니다. 유다의 조그마한 황무지보다는 제국 내부의 분열에 더 큰 위협을 정리하기 위한 결단이었지만, 공성전을 준비하며 죽음을 불사했던 유다로서는 갑작스런 적의 철군이라는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읽게 됩니다.

오늘 제 1 독서는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매우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 (2 열왕 19,31)이 다윗의 도성 예루살렘의 함락을 허락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신앙의 눈으로 역사를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 해석은 다시금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라는 방향을 제시합니다.

성경이 세상을 평가하는 시금석이 바로 “법”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법”을 주신 분이십니다. 이 “법”이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하느님의 백성”을 만듭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 법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스라엘의 고난은 이스라엘 스스로가 이 법을 무시한 결과라는 결론을 낳게됩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살고 싶으면 하느님께서 주신 법대로 살아라”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나오게되는데 이 사람들을 가리켜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성서적인 의미에서 예언자는 미래를 미리 예측하고 점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담긴 법의 정신을 일깨우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법의 정신이 오염되고 곡해되면 그 법에 따라 살아야할 “백성”의 삶도 왜곡될 수 밖에 없습니다. 더이상 그 백성은 건강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없고 그러한 백성의 나라는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때때로 이 법은 그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왜곡될 수 있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법 위에 군림하고 그 법을 자기 이익의 도구로 삼을 때, 법은 더이상 만인을 위한 법이 아니라 “만명만을 위한 법”으로 변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법”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짚어 주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법은 둘 이상의 사람들의 이해관계에서 어느 한 사람이 부당한 이익을 취하거나, 혹은 반대로 부당한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주는 최소한의 규범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법이 무너졌을 때 예언자들은 분연히 일어나서 외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예언자들은 특히 법을 교육하고, 집행하고, 관리하는 왕, 예언자, 사제, 관리 등등 사회의 핵심 인사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만 예언자들의 외침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백성 공동체 전체를 향해서 선포됩니다.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카 같은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들의 기록들은 사회의 다양한 곳에서 행해지던 불법과 부정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민중들의 삶 속에서 각자가 스스로를 개혁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에만 매달리게 될 때 그 사회는 모래알처럼 조그마한 자극에도 흩어지고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법도 나의 것만을 고집하는 사회에서는 효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세상에 당신의 법이 사람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다른 사회”, “다른 국가”를 세우셨으나 - 이것이 바로 “거룩함”의 핵심입니다 -  사람의 욕심은 그 이상마저도 자신의 논리와 이익을 위한 도구로 왜곡하기 십상입니다. 멀리 볼 것도 없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는 가르침을 새겨 듣지 못하면, 결국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자신 뿐만 아니라 온 사회가 물고 물어 뜯는 하급사회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번의 선거를 통해서 학습합니다. 우리 사회가 “함께”라는 좁은 문 외면하고 사는 한 우리에게서 “거룩함”은 고사하고, 하느님의 법도 신앙 조차도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가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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