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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homepage] (2010-06-30 23:01:54, Hit : 723)
<하늘나라의 낯설음> :::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① 아모 5,14-15.21-24 ㉥ 마태 8,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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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를 오늘 복음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다가 마귀들린 사람 둘과 마주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본 마귀들은 난리를 치며 예수님께 자기들을 돼지들 속으로 들여보내달라고 청합니다. 그래서 마귀들은 돼지들에게로 옮겨가고 벼랑 끝으로 떨어져 호수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좀 뜯어 보겠습니다.
첫째, 마귀들이 “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무슨 때일까요 ? 본문에서 마귀들은 “저희를 괴롭히러 오셨습니까?”라고 묻는 걸로 보아 마귀들에게는 별로 달갑지 않은 때인 것은 확실합니다.
둘째, 돼지치던 사람들의 태도가 좀 이상합니다. 아니, 자기 돼지들은 몽땅 죽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이 마을로 달려가 알린 것은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이들의 일’입니다.
셋째,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서 예수님께 한다는 이야기가 ‘이곳을 떠나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귀들렸던 사람들이 치유되었음을 감사하는 것도 아니고, 돼지떼의 폐사를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좀 엉뚱합니다. “꺼져!”. 엉뚱하긴한데 마귀들의 요구와 주민들의 요구가 대비됩니다. 마귀들도 주민들도 예수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마귀들은 자신들이 알아서 도망가는 반면, 주민들은 ‘당신이 떠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을 읽는 데 살짝 영화 친구에 나오는 장동건의 명대사가 생각나더이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 ? 니가 가라! 하와이”).

마태오 복음에서는, ‘하늘나라가 가까웠다’라는 복음 선포 (4,7)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존재방식인 ‘법’을 산에서 가르치십니다 (5-7장). 8-9장은 기적 사화들을 배치하여 이제 예수님과 함께 그분께서 선포하시는 하늘 나라가 세상에 도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은 복음의 선포자이면서 동시에 그분의 현존 자체가 복음입니다. 예수가 있는 곳에, 예수의 활동 속에 하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함께 예언자들이 예고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있는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그러므로 병고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생기를 되찾고, 어둠의 세력들이 물러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은 그 예수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에게 자기들에게서 떠나가 줄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마귀들린 사나운 두 사람때문에’ 자신들의 삶이 불편하긴 했지만 이 예수가 더더욱 마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기때문입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불편심을 갖게 하였을까요 ? 왜 사람들은 예수와 함께 찾아온 ‘하늘나라’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까 ?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냥 살던대로 살게 내버려두라고!’ 외치게 했던 것일까요 ? 그들은 안주하길 원했습니다. 낯선 변화를 두려워했습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느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아모 5,14)라고 선포합니다. 8세기 중엽 여로보암 2세 통치하에서 이스라엘은 마치 촛불의 마지막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군사, 경제적으로 어느 때보다도 더  부강하고 넉넉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부정부패와 타락, 불의와 착취, 우상숭배가 허물어져가던 이 속빈 강정을 떠바치고 있었습니다. 종교 축제일은 단지 돈벌이의 호기로 변질되었고 무슨 수를 쓰던지 성공의 결과가 신의 축복으로 여겨져 신앙마저도 하느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물질숭배에 만연한 ‘무법자들의 집단’에 들러리를 서던 시기입니다. 아모스는 분연히 일어나 그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면 혹시 ‘너희 말대로’ 정말 하느님이 함께 계셔주실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지금 회개해도 살수 있을까 말까한데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아무리 사회가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이어도 이미 너무 깊숙히 현실에 안주하고, 적당히 그 불의한 사회와 타협하고 살아가는 이들은 이들은  “올바로 시비를 가리는 이를 미워하고 바른말 하는 이를 역겨워” (5,10)합니다. 이런 시대에는 하느님도 ‘만들어’집니다. 종교가 해야할 일은 이 피곤한 경쟁의 시대에 지친 그들의 심신을 위로하고, 너 높은 곳만을 “꿈꾸며” 새로운 경쟁에 뛰어들 수 있는 불굴의 정신을 키워주는데 있노라고 역설합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는 긍정의 마인드가 성공의 비결이라며 그런 점괘를 쏟아내는 가짜 점쟁이들에 열광합니다. 그들의 하느님은 그들의 빈 말 속에 살고 있는 허상이었습니다.

분주한 일상, 현실이라는 명분에 파뭍혀 살다보니, 반성없는 막연한 신앙을 살아가다보니, 세상 안에서 계시의 빛을 바라볼 줄 모르는 신앙인에게도 복음은 여전히 도전적일 수 있습니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인 복음의 말씀들, 계시의 진리들이 우리 양심 안에서 우리를 막아세운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해야할까요 ? “주님, 제가 떠나야겠습니까 ? 아니면 주님께서 떠나시겠습니까 ?”라고 할까요, 아니면 베드로처럼 “주님,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져도 그런 일은 절대 안됩니다 !” (마태 16,22; 마르 8,32 참조)라고 온몸으로 가로 막아야할까요 ? 성모님은 그 정답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P.S. 예수님께서 열어재친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세상에 계시된지 이미 2,000년이 흘렀건만 어찌 대한민국의 뉴스들은 하나같이 기원전 8세기의 아모스 시대의 단편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요 ?  멀쩡한 강바닥을 뒤엎고 물길을 막아 환경을 살리겠다는 삽질은 그칠줄 모르고, 행정기관이 민간인을 사찰하고, 46명의 젊은이들이 나라를 지키다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건만 거짓보고와 부실한 대처로 또다른 죽음을 부르더니 처음부터 끝까지 의혹과 거짓투성이 조사로 다시금 그 죽음을 욕되게 하는 나라. 백주대낮에 가스통 짊어지고 나와 애먼 사람 잡아 패면서도 ‘법과 정의’를 지키겠다는 이상한 사람들이 활보하는 이상한 나라. 저뿐만 아니라 제 자식들은 군대도 안보내고, 국방 예산 다 깍아놓고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을러대면서, 한편에서는 전쟁이 나더라도 남이 시키는대로만 하겠다고 전쟁의 책임과 권한에 손사래를 치는 사람들이 다스리고 있는 나라 (이 사람들은 전쟁나면 뭐할지가 참 궁금). 어디에서부터 꼬인 것일까요 ?

광우병의 공포로 온 나라가 들썩 거릴 때 이런 말이 유행이었던 것 기억나실지 모르겠습니다: “노무현은 조.중.동과 싸우고 이병박은 초.중.고와 싸운다”. 어쩌다가 애들까지 들고 일어나서 MB OUT !!!을 외쳐야했나요 ? 다른 데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이 인생역전, 대박, 경쟁과 스팩쌓기에 연연하며 정직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기를 멈춘데에 있습니다. 남의 성공의 열매만을 부러워하고 열광했지 그 성공의 과정은 따져보지 않았던 데에 있습니다. 앞 뒤 안보고 결과에만 연연해서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라는 뻔한 사실조차도, 사회생활 하다보면 그것이 운때만 맞으면 백도 돼고 천도 될 수 있는 법이라고 스스로를 쇄뇌시킨데 있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던 당신이 지금 애들을 학원으로 내몰고 유명입시학원의 설명회를 쫓아 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며 어깨를 마주 잡던 친구에게 “이제 그만 뒤로 쪼그만 가줄래 ? 난 소중하니깐 !” 이라고 말하고 있진 않았습니까 ? 공안통치 시절, 인권과 민주, 평화와 통일을 이야기하고 지○탄, 사과탄 피해 도망온 시민들을 품어주던 교회가 성직자들의 천막농성마저 철거하고 야박하게 굴 때, “그래 이제 종교는 정치와 사회에 닥치고 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공산주의도 실패했고, 그 창시자인 맑스도 죽었지만 신앙인이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신앙을 괴리시키고, 세상 속에 들어오신 하느님을 다시금 머나먼 안드로메다로 유배시키려 할 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그의 명제는 늘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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