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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homepage] (2010-07-06 23:14:05, Hit : 693)
<애태우시는 하느님> ::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H2>애태우시는 하느님</H2>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① 호세 8,4-7.11-13 ㉥ 마태 9,32-38.
<span style="font-size:12pt; line-height:150%">
마태오 복음에서 두 소경의 치유이야기 (마태 9,27-31)가 오늘 복음  앞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어느 귀머거리를 고쳐주신 치유 사화 (마태 9,32-38) 가 소개됩니다. 두 개의 이야기 모두 이사야가 선포했던 메시아시대에 관한 예언이 (이사 29,19; 35,5-6; 61,1) 실현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예수님에 대한 세례자의 요한의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써 확증됩니다 (마태 11,1-5).

의학과 생물학이 여러가지 발병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기 이전, 옛날 사람들의 통념 속에서 이러한 병들은 일반적으로 부정(不淨)한 원인에 의한 결과이며, 자연히 그러한 사람들과의 접촉 또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을 못하는 병에 대한 원인이 무엇이 되었건, 성경은 치유와 구원 사이의 상관관계와 병든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부정한” 병자에게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는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이 방치된 존재였습니다. 하느님 홀로 무엇이 그에게서 “말”을 빼앗아갔는지를 아십니다 (마태 9,33).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의당 그에게 해주어야하는 것을 행하십니다: 병자들과, 소외된 이들, 고립된 이들에게 인간적인 도움의 손길을 펼치는 것,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느끼게 해주는 것 !
<blockquote>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9,35-36)

마태 9,35절은 마태 4-9장에서 소개되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한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측은지심 ! 예수님으로 하여금 군중을 향해 움직이도록 한 원인을 마태오 복음 사가는 이렇게 밝힙니다 (마태 9,36; 14,14; 15,32; [18,27]; 20,34). 복음은 군중을 향한 예수님의 태도를 한결같이 “측은한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측은한 마음이 든다<span style="font-family: palatino Linotype;">σπλαγχνίζομαι</span>’는 것은  단순히 머리 속으로만 그렇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의 명사은 “<span style="font-family: palatino Linotype;">σπλάγχνον</span>”은 창자, 위장, 심장과 같은 사람의 내장(內臟)를 의미합니다. 한국말로는 사전에 ‘걱정에 쌓인 초조한 마음 속’이라고 해설되어 있는 ‘애’라는 말에 가까운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서 ‘애타다, 애끓다, 애터지다’라는 표현을 합니다.이러한 감정은 보통 라틴어로는 compassio라고 번역되고 현대의 서양 언어들은 대게 이런 의미를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독일어 성경을 찾아 보았더니 “hatte er Mitleid mit ihne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Mit + Leiden 역시 “함께” “아파한다”는 말입니다. 모두들 ‘저주받은 인생’이라며 가까이 하기를 꺼리는 사람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고통 속에 “시달리고 내팽겨쳐진 (<span style="font-family: palatino Linotype;">ἐσκυλμένοι καὶ ἐρριμμένοι</span>, 마태 9,36)” 사람들을 ‘나몰라’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과 함께, 그들 때문에 ‘애태우시는 하느님’을 보여주십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만들어진 신’에 열광하는 백성에서 ‘참 하느님’을 찾으라고 부르짖습니다. 풍요와 성공만을 조장하는 신, 정의와 공정을 무시하고 오로지 ‘성공시대’만을 외치며 그렇게 얻은 부와 명예를 ‘하느님의 선물’로 포장하는 이들은 호세아 시대에만 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느님 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포장하고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곤 다른 이들에게 선전합니다. “하느님께 인정받고 싶은가 ? 축복받고 싶은가 ? 구원의 증거는 멀리 있지 않다! 축복은 당신의 계좌에 적힌 숫자에 비례한다 ! 당신의 아파트 평수에 비례한다” 이런 이들에게 ‘저주 받은 사람들’의 고통에 함께 어우러지고 (共鳴) 있는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과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라는 그의 복음은 눈엣 가시일 수 밖에 없습니다.
<blockquote>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마태 5,3-12)

어느 시대에나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무마시키려는 사람들도 존재하는 법 ! 마태오 복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기 직전에 그러한 자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마태 10,17-18) 우연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양들을 위해 밤을 지새우는 착한 목자들처럼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로 향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슬며시 의구심을 품도록 조장하고 시비를 걸며 깽판치는 이들에 대항해 싸워야합니다.</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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