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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소리 님께서 남기신 글 (2004-04-16 19:20:04, Hit : 1021)
죽을 힘으로 사십시오 - 사순 제5주일 강론

사실, 어느 신부님이든 당신께서 체험하신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어떤 형식의 레파토리를 띄게 됩니다. 고통, 가난, 치유, 은총,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들이 다양하면서도 일정의 이야기 틀을 지니게 되지요.

저에게 오늘 강론은 하나의 <레파토리>가 될 듯 싶습니다. 이 강론은 이미 안락에서 사순 5주에 했던 강론입니다. 사순의 마지막 주, 이제는 예수님의 죽음길과 함께 나의 죽음길을 묵상해야하는 날, 아직 저는 이 강론의 방식만큼 그것을 잘 전달 할 수 있는 방법을 체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부터 지금까지 그냥 강론 쓰는 일은 제쳐두고 그저 저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체하였습니다.

글쎄요... 이미 들은 강론이라고 넘기지 마시고, 이 강론따라 나도 한 번 내 사진에 검은 띠 두 줄 둘러보심이 어떨지 싶습니다.

아마 그 속에 참으로 답이 있으니까요...

죽어야만 부활할 수 있으니... 모두 잘 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 부활에 우리의 목숨을 맡겨 놓으시기 바랍니다.

또 그 강론... 나갑니다.

<사순 제5주일 강론>

<죽을 힘으로>

지난 주간 너무도 많은 죽음이 있었습니다.

이라크에서 무고하게 죽어 가는 숱한 사람들말고도 먼저 저희 본당 주임신부님의 형님이신 한요한 어르신께서 돌아가셨고, 또 저의 입학동기 신부인 김동환 마지아 군종 신부의 어머니께서 3년에 가까운 투병 끝에 돌아가셨습니다. 여기 저기 문상을 다니며 많은 생각들을 하게되었습니다.

죽음은 이렇게 늘 가까이 있는 것인데, 왜 자꾸만 모르는 척하고 싶은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세상 사람 다 죽어도 나는 안 죽을 것처럼 그렇게 아웅거리며 사는지... 우리는 죽음에 관하여 일정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우리는 죽음을 아주 쉽게 '생활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잘 쓰는 말, 그냥 생각 없이 입에 붙은 말 중의 하나가 '죽겠네'라는 말입니다. '바빠 죽겠네', '하기 싫어 죽겠네', '정신 없어 죽겠네', '일어나기 싫어 죽겠네...' 아예 입에 붙은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재미있는 일도, 우스운 일도 죽겠네를 붙여야 말이 됩니다. 아마 죽는다는 말을 우리처럼 이렇게 자연스럽게 쓰는 민족도 드물 듯합니다.

하지만 죽겠다, 죽겠다, 말은 곧잘 하는데 막상, "당신 정말 죽고 싶으세요?" 라고 물으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한 대 맞을 겁니다. 그지요?

이처럼, 죽음이라는 단어의 생활화와는 정반대로 죽음이라는 상황은 극단적으로 회피하려는 이중성도 우리는 똑같이 지니고 있습니다. 죽을 死자... 그것과는 전혀 무관한 아라비아 '4'자가 푸대접을 받습니다. 어느 건물에 가도 4층은 잘 없습니다. 엘리베이터에 F라고만 되어있습니다. 사람이름에 죽을 死자 들어간 이름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죽음을 담보로 싸우는 군대마저도 4자 들어간 것은 잘 없습니다.

얼마 전 부산의 어느 성당에서 교육관을 지으며, 신자들과 지역 주민들을 위해 영안실을 함께 만들고자 했습니다. 다들 집에서 손님 치르긴 쉽지 않고, 또 병원 영안실은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복지 차원으로, 지역 주민들에게도 개방한다는 조건으로 시작된 공사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성당은 영안실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주민들의 민원과 공사 반대데모 때문이었습니다. 왜 못 짓게 하는가? 결론은 하나 뿐입니다. "재수 없다!"는 것이지요. 자기 집 옆에 장의차가 왔다갔다하고, 시체가 안치되는 것이 재수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반대하던 사람들도 반드시 그 재수 없는 일을 당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은 이다지도 푸대접을 받습니다. 사실 죽음은 재수 없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것입니다.

죽음 앞에 인간은 철저히 무너집니다. 제 아무리 돈 많던 사람도, 제 아무리 능력 있던 사람도, 제 아무리 잘났다고 떠들던 사람도 죽음 앞에서면 평등해집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질 못합니다. 그냥 빈손으로 떠나가야 합니다. 그냥 돌아가는 것.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그것이 죽음이 가진 힘입니다.

이러한 죽음의 파괴력이 오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힘을 달리합니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중단시키고, 또 모든 것을 파기시켜 버리는 이 죽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도리어 엄청난 역전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에게 죽음은 끝장 나버리는 파괴가 아니라, 영원히 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돌변합니다. 예수님에게 죽음은 생명을 위한 귀중한 도구가 되고, 예수님에게 죽음은 생명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이 죽음의 길을 자청하십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당신이 이 죽음의 길을 앞장서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당신께서 쳐 이기실 죽음의 끝을 주님은 미리 알고 계신 듯 확신에 찬 모습을 오늘 요한 복음은 전해줍니다.

오늘 요한 복음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논리적인 전개도 아니요, 사건의 순서에 들어맞지도 않습니다. 요한은 사실 보도를 위해 이 복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예수라는 존재를 통하여 무엇을 체험하고 어떠한 변화를 일으켰는지, 묵상한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기 위해 이 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요한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 스스로 앞장서신 사건으로 이해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이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죽음마저도 깨부수시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 죽음을 통하여 우리 삶의 길이 열렸습니다. 당신은 죽고 우리는 살아났습니다. 우리 역시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는 결국 사람이 살아가게끔 만드는 길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만히 보면, 죽음이라는 힘이 있어 이 삶을 살게 합니다. 따지고 보면, 죽기 싫어서라도 살아가게 만듭니다.

태종대 자살바위에서 떨어져 죽으려는 젊은이에게 어른들이 말리며 하시는 말씀, "아, 이 사람아, 죽을힘으로 살어라!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죽을힘으로 산다면 안될 일이 없습니다.

지극히 역설적으로, 죽음은 삶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원동력이요, 에너지이며, 삶의 門입니다. 죽음을 열고 들어가면 삶이 보입니다. 죽음 앞에 서면 답이 보입니다.

살아서는 정말 하기 싫은 일도 많고, 하기 힘든 일도 많고, 버리지 못할 것도 많고 지기 싫은 것도 많은데, 지금 내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그 하기 싫고, 버리기 싫고, 지기 싫던 그 마음들은 도무지 아무 것도 아닌 그저 헛겁떼기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 많이도 바쁘고, 참 중요한 것들도 많은데 사실 그것들은 하나도 안 바빠도 되는 일, 하나도 안 중요한 일인데, 정작 바빠야 할 일이 무엇이고, 진짜 중요해야 할 일이 그게 아닌데, 죽음은 바로 그 사실을 깨닫게 만듭니다.

전에 어느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만나자 마자 펑펑 우셨습니다. 성당도 15년을 냉담하셨다합니다. 먹고 사느라 바빴고, 아이 키우느라 바빴고, 모태신앙이었지만, 결혼하고는 성당도 나오지 못할만큼 그렇게 바쁘게 살았답니다.

이제는 아이들도 어느 정도 크고 남편일도 자리를 잡고 해서 살만하다 싶었는데, 속이 좋지 않아 병원엘 가보았더니 암이랍니다. 다섯 달을 넘기기가 힘이 든답니다. 가족들에게는 말도 못하고,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린가... 귀에도 안 들어오더니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하며 살았나 싶더랍니다.

바빠 죽겠는데, 하느님은 무슨 놈의 하느님, 내 팽겨쳐 놓은 그 하느님이 생각나더랍니다. 그래서 성당엘 찾아오신 것입니다. 저에게 그러십니다. "신부님, 제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빴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아웅거렸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신부님... 저 어떻하면 좋겠습니까?"

그 자매님, 당신 죽음 잘 준비하며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나마 6개월 동안이지만 왜 나고, 왜 살고, 왜 죽어야 하는지... 늦게나마 잘 깨닫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범일 교우님들도 참 걱정꺼리도 많고, 또 다들 바쁘시지요? 참 억울한 일들도 많을 것이고, 불만 가득한 일, 나를 짜증나게 하는 일, 그리고 가지고 싶은 것들도 많으시지요? 제가 그 고민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하나 아는데, 가르쳐 드릴까요?

그래서 교보재를 준비해왔습니다. (조영만, 크게 확대한 증명사진) 누굽니까? 잘 생긴 범일성당 보좌신부 아닙니까? 저도 이 얼굴로 살 때는 참 고민이 많습니다. 저도 이 얼굴로 살 때는 참 걱정꺼리도 많습니다. 저도 이 얼굴로 살 때는 욕심도 참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끔은 괴롭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어떻하면 이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가?

자 여기에다가 이것만 깨끗이 해결됩니다.(조영만 영정사진) 만사가 걱정 뚝 입니다. 자 어떻습니까? 깨끗하지요. 가만히 이 사진을 한 번 보십시오. 무엇이 문제고 무엇이 중요했습니까? 언젠가 반드시 저의 식어버린 육신 앞에 이 사진 놓고 나를 알던 사람들, 나의 가족들이 이 사진 보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다가 돌아앉아서는 돼지 수육에 신 김치 얹어가며 나에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 할 날이 반드시 옵니다. 재수 없어도 할 수 없고, 불행해도 할 수 없습니다.

어제 저는 방에서 촛불 한 자루 켜놓고 이 사진을 가만히 쳐다보았습니다. 이 사진 앞에서면 진짜 중요한 일이 무엇이고, 정작 무엇 때문에 제대로 바빠야 하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나의 죽음 앞에 내가 무엇 때문에, 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힘을 얻어야 합니다. 살기 싫다면 정말 죽을힘으로라도 제대로 한 번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오늘 집에 가서 여러분들의 사진에 줄 두 개만 그어보십시오.
그 안에 답이 있습니다.

무엇을 못하고, 무엇이 아쉽습니까? 왜 안됩니까? 왜 안합니까? 죽음 안에 우리 삶의 답이 있습니다. 이걸 깨닫는 사람은 바로 이것이 부활입니다. 죽고 싶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으니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죽음을 통한 삶의 길을 아셨고, 그것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이 자신의 죽음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가셨고, 또 그 길의 끝에 참된 부활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과 이미 살면서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 그래서 그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 누가 더 행복하겠습니까? 누가 더 강하겠습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참으로 죽을힘으로 살아가십시오.

저도 이제 이 사진을 제 방에 붙여두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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