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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2016-11-21 08:43:33, Hit : 466)
<7년 전의 감실> 김범우 순교자 성당 순례자 미사

<그리스도왕 대축일>

(INTRO)
인간의 지성이 그다지 근대화되지 않았던 시절, 전제군주인 왕이 있고 그 절대 권력자인 왕이 베풀어주는 하해와 같은 은공에 힘입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밥이라도 먹고 살게 해주심에 대하여 아주 감사해야하는 백성으로 존재해야 했던 시절이, 사실 인간의 물리적 역사에서는 훨씬 더 길었습니다. 현대화된 시민의식, 주권과 민주에 대한 의식이 생겨난 것은 불과 200년 혹은 250년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시대가 바뀌었으나, 아직도 사고는 그 시대와 이별하지 못한 이들이 더 많은 듯한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는 것이 그다지 어렵다는 생각은 별로 안드시겠지만, 그래도 교회가 나서서 친절하게 각주를 달아주기를, 오늘 우리가 축제를 지내는 그리스도라는 왕은 세속에서 말하는 무소불위의 왕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음 속으로 기어들어간, 사제요 예언자요 봉사자의 왕이라 시대적 해설을 덧붙여 준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를 내어던진 이 왕의 축일에, 오늘 김범우라는 220년 전에 한양 명동에서 귀양살이를 내려와 모든 것 잃고 이 자리에 묻힌 한 순교자의 무덤가에서 ‘왕’의 미사를 봉헌한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자, 내 인생에 몇 번 찾아오지 않을 사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 미사를 순교지에서 봉헌하며 이 시대가,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이 보고 듣고 그리고 살아내야 할 왕의 모습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한 순교자의 죽음 앞에서 다시금 깊이 새겨보도록 합시다. 잠시 침묵으로 오늘 미사를 준비합시다.

(강론)

<캄프린트포트의 감실>

저는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조영만 세례자요한 신부입니다. 오늘 순례를 오신분들이나, 혹은 이 근처에 살고 계시는 신앙인분들이나,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사실 저는 10여년 전에 몇년을 독일에서 파독 광부, 간호사들과 함께 살다왔습니다.

먹고 살 것이 없었던 60년대 돈을 벌기 위해 독일로 떠난 광부들이 9000여명, 간호사들이 70년대 후반까지 만 명이 넘었었지요. 한국에서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탄광촌에 자리를 잡은 4,50년 전의 한국 젊은이들이, 물론 천박한 자본주의의 전형을 보여주는 한국 국민성이 수십 만명에 달하는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을 얕보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동양의 하급 노동자로 찾아온 한국 사람들을 그다지 환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주로 찾았던 곳은 독일 중북부에 산재되어 있는 탄광촌들인데, 한국으로 치면 산 속에 탄광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니더라인. 곧 평평한 평지 아래에 탄층이 내재되어 있어 광활한 평야지대와 탄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라인강이 흐르는 중북부의 딘스라켄, 그리고 캄프린포트 등의 시골 마을이 한국인 광부들의 첫 번째 일자리였지요.

인구가 약 5만 정도 되는 캄프린포트를 가면 성당이 5개가 있는데, 주일날 할 일이 없는 한국인들이 성당을 나가도 뭐 그다지 독일 사람들이 마늘 냄새 나는 한국 사람을 환영을 했겠습니까? 그래서 독일 니더라인 캄프린포트의 상트 파울루스 성당의 주임신부님이 생각하기를, ‘이 어려운 나라 한국의 노동자들과 독일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어주자.’ 해서 짜낸 아이디어가 세례를 받는 한국 사람들의 세례 대부를 하나하나 독일 사람들에게 배정을 시킨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처음에는 냄새난다고 꺼려하던 독일 사람도 아니 내 대자가 한국 사람인데 어떻합니까? 하나하나 챙기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리고 한국 사람들 입장에서도 주일이면 대부님이 기다리고 계신데 미사 안갈 수 없지요. 그리고 미사 가서 대부님 만나서 독일말도 배우고 독일 식사도 함께 하니 한국인 신자들도 늘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독일 파울루스 성당은 독일 내에서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은 시골 성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골 성당이 새로 건축을 하게 됩니다. 그 때가 1971년입니다. 중세식의 성당이 아니라 모데르나한 현대식 건물을 디자인한 본당신부님이 하루는 한국신자의 대표자를 부르시더랍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 성당은 이미 독일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이 함께 미사를 한다. 그러니 성당의 중심인 감실을 만드는데 우리 독일말과 한국말을 함께 새기도록 하자. 너네 나라 말로 요한 복음 1장 1절을 어떻게 쓰느냐? 한국말을 써서 와봐라.’ 하시더라는 거지요.

신이난 한국인 신자가 그 길로 달려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는 한국 글씨를 드리니, 독일신부님께서 같은 구절인 요한복음 1장 1절. Im Anfang war das Wort, und das Wort war bei Gott, und Gott war das Wort. 말씀과, 미사 경문 가운데,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어줄,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Fuer das Leben der Welt, nehmt und esst alle davon’ 그리고 그 옆에 한국 글씨로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새번역 성경에는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를 정육면체의 감실 벽에 디자인을 새기게 되었지요.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그러나 39년이 지나, 지난 2009년 상트 파울루스 성당이 폐쇄 결정이 나고, 한국 신자들과 독일 신자들이 함께 썼던 성당의 성물들을 해체해야 했을 때, 다른 건 다 몰라도, 한글이 씌여진 이 감실만은 한국으로 보내자 하여, 독일 교구청에 허락을 받고 그것을 일일이 포장을 하여 보낸 그 감실이 바로 오늘 미사를 하는 이 자리, 삼랑진 용전리, 김범우 순교자 경당에 있고, 또 그것을 보냈던 신부가 7년만에 돌아와 그 감실 앞에서 이렇게 미사와 강론을 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또 경탄할 일인지요!

2009년 6월 20일. 39년 동안 한 제단에 모여 미사를 했던 한국 사람들과 독일 사람들의 마지막 미사에서 동시 통역을 하며 봉헌했던 저의 강론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저 감실 앞에서 제가 했던 미사와 강론을 다시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정말로 몰랐습니다. 그러나 오늘. 다시금 7년이 지나, 이제는 니더라인 캄프린트포트가 아니라, 내 나라 이 조국에서 그 때 모시던 감실 앞에서 다시금 이 미사와 이 강론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동적이고 감사한 일인지를! 어떻습니까? 그날 독일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 앞에서 했던 마지막 미사에서의 강론을 제가 한 번 들려드려도 되겠습니까?

<다르지만 같은 우리들>

많이 다른 두 나라의 사람들이 한 제대에 모였습니다. 생김도 다르고 역사도 다릅니다.
하지만 한 종교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모인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다르지만,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하나요, 우리의 현실도 하나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음 달이면 39년의 세월을 우리와 함께 했던 이 파울루스 성당과 이별해야합니다. 피하고 싶지만 이것은 우리들의 공통된 현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힘겹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다시금 새로운 약속을 향해 떠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아픈 현실이면서도 동시에, 같은 믿음 안에서 함께 배워온 '가톨릭 신앙'이라는 큰 틀 안에서 수긍해야할 할 현실입니다.

우리가 오랜 세월 간직해온 믿음의 주요 골자는 <떠나라!>는 명령에서 비롯되었음을,
저는 이 강론을 시작하며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한국인 사제입니다.
우리 한국 가톨릭의 역사는 독일 가톨릭의 역사와는 비견되지 않을 정도로 짧습니다.
250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 가톨릭교회의 일원으로써
한국가톨릭 교회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자긍심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교사들에 의해 선교된 나라가 아니라, 평신도들 스스로가 진리를 찾고, 사제를 찾고, 교회를 찾아 나선 나라가 바로 '한국 가톨릭교회'라는 사실입니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초창기 신자들은 높은 권력자도 아니었고 많이 배운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리의 말씀을 듣는 순간, 매료당했습니다.
세례받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이름도 낯선 예수와 마리아를 가슴에 간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댓가는 참혹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고향으로부터 떠나야 했습니다.
시골로 산속으로 더러는 동굴에 숨기도 했습니다.
익숙했던 모든 것들을 철저히 버리고 떠났으면서도 그들은 예수가 우리의 하느님이시오,
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00년 가까운 박해를 통해 10,000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교회가 바로 한국 가톨릭교회입니다. 저는 그 순교자의 후예로서 우리 조상들이 남겨주신 신앙의 뿌리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 있었던 그 믿음의 교훈을 가슴 깊이 새기며 삽니다.

고향을 등지고, 가족을 등지고, 생계와 편안함을 등지고 떠났던 그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출발을, 저는 오늘 여러분 앞에 우리 공통의 믿음으로 선포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 믿음의 시작은 바로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의 떠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는 '하란'이라는 땅에서 잘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간섭이 없었더라면 그는 편한 여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훼 하느님은 그에게 약속의 땅으로 떠날 것을 명령하셨고(창세 12,1-3) 거기에서부터 우리가 믿는 이 종교는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일흔 다섯이었습니다.(창세 12,4)

일흔 다섯의 노인네가 오로지 구원의 약속 하나만을 받아들고 떠났을 때의 그 '처연함'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 신앙의 모든 선조들 역시 같은 운명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사악도, 야곱도, 유다도, 그리고 세월이 흘려 요셉과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펼쳐 떠남을 命 받지 않았던 믿음의 조상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믿는 예수 그리스도 또한 언제나 '떠나던 스승'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이름난 선생이었고 능력 있는 치유자였습니다. 저 한 몸 살고자 했으면 언제든 그는 편히 살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도 그것을 원했습니다. 여기다가 우리의 왕국을 세우자고 말이지요.(요한 6,15) 초막 셋을 지어 선생님께 드리겠다(마태 17,4)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는 단호했습니다. "가야 한다. 다음 마을에도 가자. 나는 이 일을 하러왔다."(마르 1,38) 하시며 떠났습니다. 겟세마니에서 당신을 잡으러온 이들 앞에서도, 그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잠들어있는 제자들을 흔들어 깨우며, "일어나 가자!"(마태 26,46) 하시며 기어이 십자가의 죽음을 끌어안으셨고, 거기에서부터 다시 한 번 이 종교는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떠남은 언제나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익숙했던 것들과 결별한다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떠남을 통해서만 성장이 있었고, 은총과 자비가 주어졌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독일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이곳 파울루스 성당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왔던 한국 신자들 모두는 그렇게 '떠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한국 신자들을 여러분은 참으로 따뜻하게 대해주셨습니다.
형제처럼 맞아주셨고, 이 성당과 강당을 매 주일 쓸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습니다.
파울루스 성당은 여러분에게 뿐만 아니라
이 한인 신자들에게도 마치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신자들은 견진을 받고 혼배성사를 했으며 자녀들을 세례 받게 하였습니다.
마음 둘 곳 없던 이 한국 신자들에게 파울루스 성당과 여러분은 참으로 좋은 친구들이었고, 귀한 동반자였으며, 값진 제대이자 방주였습니다.

1971년 이 성당을 지으신 '페터 얀센' 신부님께서는 30년 동안 이곳 파울루스 성당에서 주임신부님으로 계시며, 성체를 모시는 감실을 만드실 적에 감실에 한국 글씨로 성경말씀을 새길 수 있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이토록 극진히 대접해준 적이 없는 '사건'임을, 7개월 전 제가 처음 이곳에 부임해왔을 때 한인신자들은 가장 먼저 저 감실을 저에게 자랑했고 그리고 기뻐했습니다.

독일 신자 여러분이 그 동안 어떤 방식으로 이 이방인들을 사랑해주었는지, 여러분이 낯선 나라 한국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신뢰와 친교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저는 이곳 파울루스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저 감실의 문을 열 때마다, 독일 신자들과 얀센 신부님께서 한인 신자들에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에 늘 감사해왔습니다.

한국말로 감실에 씌여진 성구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내용입니다.
태초에 계셨던 그 말씀은 우리 가운데 오셨으며,
말씀이신 그리스도 그분은 오로지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하여,
우리 속으로 떠나오신 분이었습니다.

떠남은 곧 하나 되기 위해서입니다.
분리되기 위해서 떠나지 않습니다.
나를 떠남으로써 너와 하나 되고,
판단을 떠남으로써 용서와 하나 되고,
편안함과 익숙함을 떠남으로써 성장과 하나될 것입니다.  

39년 파울루스 성당과 감실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신앙의 교훈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파울루스에서 받았던 말씀과 기도와 성체는 모두
이제 우리를 다시금 하나 되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파울루스에서 체험했던 감동과 눈물과 회개는 모두
이제 우리를 다시금 더 큰 용서와 화합으로 이끌 것입니다.

우리가 이 파울루스에서 만났던 성사들, 은총들, 변화들 모두는
이제 우리를 다시금 더 큰 성장으로 이끌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오로지 하나 되기 위해 다시금 떠나는 순간,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에게 새롭게 제안하셨던 구원과 희망의 약속들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신앙생활을 해왔던 한국 신자들의 지도신부로서,
저는 먼저 독일 신자분들에게 부탁합니다.
이 파울루스 성당 30년의 세월 동안 그렇게 해주셨던 것처럼, 요셉 성당이라는 새로운 공동체에서도 하나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한인 신자들을 사랑해주십시오.

한인 신자들에게는 권고합니다.
새롭게 만나게 될 공동체 요셉 성당에서도 저는 여러분이 한국 순교자들의 후손들임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그들은 버렸고 떠났고 갈망했습니다. 파울루스에서 우리는 성장했고 이제 요셉 성당에서 우리는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1971년. 이 파울루스 성당과 저의 나이가 같습니다.
저는 사라지더라도 저와 함께 했던 기억은 남는 것처럼,
이 파울루스 39년의 역사는 우리 믿음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며,
그 파울루스의 역사 가운데 또 한 편의 아름다운 기억이 될 오늘 밤을
오랫동안 간직할 것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끝이란 것이 존재하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영원' 밖에는 없나니,
이 파울루스 성당도 그 영원 속에 지워지지 않는 생명의 글씨로 간직되기를,
그리고 오늘 이 미사가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찬미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순교자들의 역사. 신앙인들의 역사. 그리고 예언자와 증거자들의 역사. 7년 전의 강론을 들어주신 모든 순례자와 신앙인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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