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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소리 님께서 남기신 글 (2004-04-10 00:06:48, Hit : 890)
눈물 속의 은총... 대림 3주 목요일

<눈물 속에 담긴 은총입니다>

태몽이란 것이 있습니다. 아이를 가진 어머니가 꿈속에서 호랑이니, 용이니 하는 짐승들을 보기도 하고 아름다운 꽃을 보았다고들 하면 사람들은 그 꿈 이야기를 통해 이 아이의 미래에 대해 갖은 기대를 갖기도 합니다. 사실 태몽이란 것이 있으나 없으나,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이자 은총임이 분명합니다만은 꼭 그렇지 만도 않은가 봅니다.

두 딸만 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작은 사업을 하는 남편과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 자매는 또 다시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아들 딸 구별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는 가족계획이 마치 무슨 예의처럼 생각되던 시절이어서 그랬는지 남편은 더 이상 아이 낳기를 원칠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자였던 이 어머니는 아이를 지우자는 남편의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인데 내 손으로 그것을 죽일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다행히 아들을 원하셨던 시어머니께서 혹시 아들일지도 모르니 이번 한 번 더 낳아보자고 밀어주신 덕분에 자매는 아이를 순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세상에, 아이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이나, 그것도 순전히 딸들만, 세쌍둥이가 턱하니 이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날 이후부터 남편과 이 자매의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아들 보자고 밀어주었던 시어머니마저 할 말을 잊으셨습니다.

두 딸로도 힘들어하던 남편은 당신이 믿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천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서슴없이 원망하였습니다. 말이 좋아 세 쌍둥이지, 세 명이 한꺼번에 젖 달라 울고 보채지, 한 명이 울면 영문도 모른체 세 명이 같이 울기 시작하면 그게 어디 맨정신으로 키울 일 입니까? 그런데도 남편은 남사스럽다고 아이들을 쳐다보는 것조차 싫어했습니다. 배울만큼 배웠다는 여자가 그렇게도 미련할 수 있냐고, 아내를 구박만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어머니는 그 구박과 시련 속에서도, 한꺼번에 태어난 이 세 딸이 하느님의 선물들이고 은총들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어렵던 남편의 사업도 아이들이 생기고 난 후부터 그래도 다섯 명의 자녀를 키워낼 수 있을 만큼 어찌 어찌 되어가고 자매님은 엎고 안고 끌고 하며 이 아이들을 감사와 사랑으로, 신앙으로 길러내었습니다. 세례명도 세 천사의 이름을 따서 미카엘라, 라파엘라, 가브리엘라로 지었습니다.

이 세 명은 저희 성당에서 유명한 세 천사들입니다. 이제는 커서 중학교 2학년이 되었습니다. 토요일이면 얼굴 비슷한 세 소녀가 학생미사 때 나란히 앉아 미사를 참여하고 다음날 주일 아침이면, 어머니와 두 언니,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자그마치 일곱 여자가 한 자리에 앉아 또 한 번 주일미사를 참여합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키우십니다. 매일 저녁, 마치 수녀원처럼 온 가족이 모여 기도를 하고 한 달에 한 번은 꼭꼭 잘 성찰한 찰고지를 들고와 고해성사를 봅니다. 남편도 이제는 이 아이들 하나 하나를 얼마나 귀여워하고 감사해 하는지 모른다고 그 자매는 은근히 자랑하십니다.

몸과 마음이 얼마나 건강하게 자라는지, 정말로 자랑하고 싶은 성가정의 자녀로 살고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행복과 불행을 선택하는 것은 바로 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행복을 선택하고자 마음먹으면, 세상 사람들이 제 아무리 불행하다고 생각되는 일조차도 그것을 행복으로 바꾸어 내는 힘이 신앙에서 나옵니다.  

은총도 그것을 은총으로 볼 줄 알아야 은총이 됩니다. 무수한 은총이 마치 쏟아지듯 내리는 하루를 살면서도 그것이 은총인 줄 모르는 사람들은 불평과 불만만 가득할 따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총을 바라면서도 '그저 먹으려는', '날로 먹으려는 은총'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눈물 없이, 고통 없이 그저 단맛만 내는 은총만을 바랍니다.

그러나 진실로 참된 은총은 눈물 속에 담긴 것이고 고통 속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너도 나도 십자가가 선물이고, 은총이며, 축복이라고 말들은 하면서도 정작 십자가는 지기 싫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십자가라는 눈물과 고통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이라는 은총과 축복의 맛을 체험할 수가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의 즈가리야와 엘리사벳, 그들에게 이 아이의 탄생이 과연 축복이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예언자들의 삶이 고단하기 마련이지만 나기도 전부터 예언자의 길을 점지 받은 이 아들이 앞으로 어떤 고생을 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그 부모들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예언자는 결국 권력자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까지도 신실했던 그 부모들이 몰랐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통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구원은 실현된다는 그 깊이까지 내려갈 수 있었기에 고단한 운명을 지고 태어나는 이 아기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生命입니다. 말 그대로 命이 살아있다(生)는 소리입니다. 우리 한 명 한 명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命이 살아있기에 오늘도 목숨이 붙어 있는 인생들입니다. 그 命이 무엇인지요? 어떤 하느님의 命이 나에게 있어 오늘 이 하루를 살아라 하십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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