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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소리 님께서 남기신 글 (2004-04-10 00:05:27, Hit : 997)
신앙은 희망입니다. 대림3주일 강론


<대림 제3주일 강론>

<신앙은 희망, 생명에 대한 희망>

소리가 있고 말씀이 있습니다.
소리의 목적이 전달하는 것이라면 말씀의 목적은 마음 속에 새기는 데 있습니다.
소리는 사라지지만 말씀은 남습니다. 소리가 시끄럽고 요란스런 것이라면, 말씀은 오히려 고요함과 침묵 속에서 빛이 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소리라고 일성을 놓습니다. 그것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 합니다. 광야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닙니다. 광야의 많은 밤은 침묵과 고독, 그리고 수도의 공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런 곳에서 깊이 우려낸 소리와도 같습니다. 그 절대침묵의 고행 끝에 예언자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를 향해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에 빛이 왔습니다. 구원의 빛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시오, 변화할 것을 결심하시오.

예수께서도 세례자 요한의 이 소리에 움직임을 시작하셨습니다. 4복음서 모두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최소한 요한의 등장과 그의 죽음, 그 이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예수 스스로 그를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 요한 세례자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실 정도로 세례자 요한에게 호의적이셨으며 심지어 그에게 세례까지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이 사실은 초세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대단한 부담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라는 예언자에게 세례를 받으시다니, 그리고 그 때까지 세례자 요한을 따르던 그의 추종자들과 자신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처럼, 요한은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는 인물이고,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의 길을 고르게 하기 위해 외치는 이의 소리였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비록 세례는 베풀었지만 본인 스스로도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는 인물이라고 고백했음을 상기시킵니다. 이런 증언들은 모두 사람들의 시선을 세례자 요한을 넘어 예수님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장치들로 이해하시면 좋으실 듯 싶습니다.

물론, 요한과 예수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신앙이 내 삶의 변화라고 생각하는 데에 있어 두 분은 뜻을 함께 하십니다. 그 시대에도 세례를 베풀던 다른 단체들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인도의 강에서는 자기 정화의 표시로 그 물에서 몸을 씻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세례 운동은 물에 자기 몸을 씻는 것을 단순히 자신의 정화나타내는 의례 행위였다 한다면,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하느님께로 자기의 삶을 바꾸어 놓겠다는 다짐이었다는 사실이 새로울 뿐만 아니라 이것에 예수님은 동의하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요한의 것과는 차이점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설교하고 가르친 하느님은 준엄하게 심판을 내리실 하느님이었던 반면에, 예수님은 용서하시고, 베푸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요한은 회개하라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3,10; 루가 3,9). 요한이 가르치는 바는 이렇게 위협적이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이 엄하게 심판하실 것에 강조점을 둡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심판하시기 위해 기다리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함께 계심으로써 함께 고통받으시고, 우리의 죄 때문에 마음 아파 하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은 당신의 '함께 계심'에서 아무도 제외하지 않으신다고 예수님은 믿으셨습니다.

양 백 마리 중 한 마리도 잃지 않으려는 목자와 같으신 하느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떠나간 아들이 돌아올 것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돌아온 아들을 기뻐하면서 맞이하여 잔치를 벌리는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청하시오, 주실 것입니다.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 두드리시오, 열어 주실 것입니다...그대들이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선물을 줄 줄 알진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청하는 이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습니까!"(루가 11,9. 13).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십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가 6,35-36).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시면 우리도 자비로운 하느님의 숨결을 사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이 세례 받은 사실을 전할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요한에게 머물지 않고 예수님에게 가도록 유도하는 장치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읽으면서 벌주시는 하느님에게 시선을 고정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요한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심판하시는 무서운 하느님만을 만납니다. 착한 사람 상주고, 악한 사람 벌주는 것은 우리 인간의 질서입니다. 이 질서 속에서 과연 하느님께 상 받을 사람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요한을 넘어서 우리의 시선이 예수님에게 가서 멈추면 자비하신 하느님, "청하시오, 찾으시오, 두드리시오"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당신의 숨결, 곧 성령을 베푸셔서 우리도 당신의 자비로움 안에 살아남을 수 있는 희망을 허락하십니다.

신앙은 희망하는 일입니다. 희망이 없다면 그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희망입니까? 바로 생명에 대한 희망입니다. 삶을 데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임을 불지피는 희망입니다.

어느 자매님 한 분이 제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당신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올 한해, 이것저것 아껴서 모은 돈이 30만원 가까이 되는 데, 적은 돈이지만 이것이라도 저 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드리고 싶은데, 적당한 곳이 있으면 알려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많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이 계시기에, 이 세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곳이로구나, 깨닫는 것 아닙니까?

얼마전 동래지하철 역엘 가니 두 가지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모 대선 후보의 지지를 호소하는 아줌마 집단이 역앞에서 한표 찍어주십시오. 하고 외치는 소리였고, 또 하나는 그 옆에 마련해 놓은 자선 남비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였습니다. 과연 어느 소리가 이 세상을 데우는 소리이고, 이 세상의 온도를 약 2도쯤 올려주는 소리입니까?

그런 희망이고 싶습니다. 필요를 생각하면 끝이 없습니다. 부족한 것을 보면 언제 채워질지 모르는 만족입니다. 그러나 내 눈만 바꾸면, 내 삶만 하느님께로 정향하게 되면 아이고 감사합니다라는 소리가 하루에도 수천번 쏟아질 부자들이 바로 나입니다.

희망을 전해주십시오. 남이 나에게 희망이 되길 기다리지만 마시고 내가 남에게 희망이 되어주십시오. 자선은 그런 것입니다. 자선은 내 쓰고 남은 것, 꺼내놓는 것이 자선이 아닙니다. 봉사 역시 내 할 것 다하고, 시간 넉넉하게 남을 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쁘신 분들이 더 많이 봉사하시고, 없으신 분들이 더 많이 베풀줄 아십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장미주일이라 제의도 장미색을 입었습니다. 기다림의 기쁨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기쁨을 모르시는 분들, 아무 기쁨도 없이 또 성탄이 오는가보다 하고 무덤덤 하셨던 분들, 내어놓으시지요, 가만히 있어서야 무슨 희망을 내가 키워낼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지닌 것, 이미 당신의 것입니다. 이것으로 저는 이 세상을 좀더 데우는 사람되겠습니다. 추운 날, 춥게만 느끼는 사람들에게 내 어깨를 빌려줍니다.

어제 오늘 안락성당 식구들이 배추를 천포기 김장을 했습니다. 우리 본당관할 구역내 독거 노인분들게, 그리고 연산동 물만골 공부방과 인근 복지 시설에 보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 김장을 담구었습니다. 몸은 정말로 힘들 것인데, 우리집에 한 포기 김치 생기는 일이 아닌데도 하나같이 천사처럼 웃는 낯으로 일들을 하셨습니다.

자, 희망은 무엇입니까? 왜 신앙하고자 합니까? 아직도 내 것은 부족합니까?

자선주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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