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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2018-03-06 08:50:32, Hit : 374)
<Mee too>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

<Mee too>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성인께서는 일찍이 오늘 복음 앞에서, “용서를 그렇게 자주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노여워할 시간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무한한 용서를 입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노여워할 시간이 없다.”

지극히 사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수용적 행위에 불과했던 용서가 오늘날처럼 강력한 사회적 요구로 환원되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관계, 용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무례함에 대하여 지금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으며, 상처 입은 약자의 입장에 함께 동참하려는 시대정신은 그동안 무감히 자행되어온 폭력성의 부끄러운 민낯을 고스란히 폭로하고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고, 용서받지 못한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저도 그 중에 하나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그렇고 그런 세상에 너무나도 잘 적응하다 어느새 나이를 먹어 터럭같은 권력이라는 것도 생기며 젊은 시절 욕했던 그 꼰대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는 이 비감함이라니!  

이제 용서는 더 이상 개인적 영역에서 일방적으로 수용해야만 하는 영적 단어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명시적으로. 명백하게. 용서받아야 하고. 비록 사회적 처벌은 종료되었다할지라도 한 개인의 훼손된 정신적이고 영적 건강은 어떤 방식으로든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한 용서입니다. 용서하지 못한 자가 감당해야 하는 노여움. 두려움. 불안. 그리고 자기부정.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벌어진 이 끝간데없는 노여움의 장악이 결코 건강한 상징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스스로의 영적 피폐를 가속화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용서입니다. 노여움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물론 내가 하지 않은 용서를, 교회도, 국가도, 심지어 하느님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 노여움이 더 이상 나를 망가트리지 않기를!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마태 18,22)하심은 어쩌면 용서의 시혜자 그가 아니라, 여전한 상흔 속에 노출된 나를 위한 복음이 아니었을까!

오늘도 그와 나에게 필요한 용서를 청하게 됩니다. 아멘.

루시아 아멘~ 용서는 나를 위한
복음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2018/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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