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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2018-03-13 09:12:08, Hit : 301)
<들 것>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들 것>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보면 처음에는 개나리 봇짐 지듯 경쾌히 걸어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10Km, 100Km를 넘게 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등에 짊어진 가방이 천근만근처럼 느껴지게 되지요.
그래서 하나 둘 버리게 됩니다.

분명히 출발할 때는 반드시, 꼭. 있어야만 했던 물건들입니다.
하지만 100Km 지점에 이르면, 그렇게 반드시, 꼭. 있어야 했던 물건마저도 짐이 됩니다.
그렇게 하나 둘 버리고, 짐은 최대한 가볍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뭐가 내 등에 붙어있다는 그것마저도 힘이 든 것이지요.

200Km 쯤 지나고 나면 잔머리를 굴립니다.
짐을 다음 도착할 동네까지 배달해주는 택시 서비스를 찾게 되는 것이지요.
자, 짐을 부쳤습니다. 목적지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몸만 걸으면 됩니다. 정말 가뿐하고 상쾌할 것 같지요?

아닙니다. 200Km를 넘어 걷다보면 알게 됩니다.
이 몸이 얼마나 큰 짐덩어리인지를.
이미 감각을 잃어가는 두 다리가 전봇대 마냥 땅에 박혀버리고
다리에 하중을 더하는 상체의 무게 하나하나가 다 느껴질 때쯤, 똑같이 말합니다.
이내 몸이 짐이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서른 여덟해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있던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 너의 들 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38년 동안이나 드러누워 있어야 했던 이에게 들 것은 곧 무엇이겠습니까?
고단한 육신의 짐. 죽으려해도 죽을 수가 없고, 살려고 해도 살 수가 없는.
정말로 내 뜻대로 되지를 않는 이 끔찍한 짐 덩어리인 육신의 흔적.

이내 육신이 그야말로 짐덩어리입니다.
원하지 않는데 아프고, 물리치고자 하나 줄기차게 욕망합니다.
뜻하지 않게 상처를 입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망가지고 있습니다.
두 다리로 걷다가 네 다리로 기기 시작하면서 육신의 비참은 그 민낯을 드러냅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람입니다.
죽으면 썩은 내를 진동시킬 이 육신 속에 담겨 있는 모든 것들이 나의 들 것입니다.
그것을 들고, 내 들 것을 들고, 일어서라는 겁니다.

육신이 영혼을 지배하여 비참과 죽음으로 질주했던 속도를 중단하고,
당신 한 말씀에, 영혼이 육을 이끌어 생명으로.
육은 더 작은 것으로 만들고 영은 더 큰 것으로 만들어,
어디든 떠날 수 있고 언제든 죽을 수 있는,

그렇게 아주 오래 걸을 수 있는 가벼운 짐으로 만들 수 있기를 청합니다.
들 것. 그러나 내 것.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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