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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2017-12-05 10:27:10, Hit : 342)
<육적 인간> 지속적인 성체조배회 미사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성체조배회 월미사>

(INTRO)
성당에서 가장 정갈한 곳을 찾으라면 당연히 감심을 중심으로한 제단이겠지요. 그리고 그 다음을 찾으라고 하면 그렇습니다. 감실 앞에 모여 기도할 수 있도록 배려되어진 성체조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름지기 종교란 세속과는 분리된 영역에서 행해지는 조직적 행위들이고, 그 핵심은 침묵과 돌아봄입니다.

세상은 하루 종일 끊임없이 떠들고 분망하며 망각하게 합니다. 반대로 종교, 俗과는 분리된 聖, 거룩함의 영역은 그것과 반대됩니다. 침묵하게 하고 기억하게 하고 희망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이 인간의 영과 정신에 더 큰 위로와 동력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인 거지요. 떠들고 분망한채 늙어가려는 것이 아니라, 침묵하고 돌아봄으로서 나와 이웃을 돌보려는 사람들입니다. 기도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성체조배회 월미사를 시작하면서 먼저 침묵합시다. 그리고 오랜 시간 나를 성체와 함께 머무는 여정에 동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을 이 미사의 제물로 준비하도록 합시다.

(강론)

<영적 인간>

지난 주일부터 시작해서 오늘 새벽 미사 때까지 자꾸만 멈칫 거리는 순간들이 발생하지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고 인사하면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가 뒤섞여 있습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거지요. 또 사실 한국 사람들에게 굳이 따로 당신의 영과 함께! 라고 인사하는 것 자체가 낯선 표현입니다.

한국 사람, 아니 동양 사람들은 좀 통시적인 사고를 하는 편이지요. 인사를 해도 우리는 이렇게 합니다. “가내 두루 평안하십니까?”, “두루두루 안부를 전합니다.” 뭐 몸과 마음을 따로 분리해서 인사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간 강녕하시냐?” 하면 그 안에 영혼과 육신 이런 분간은 사라지고 통으로 묶어서 잘 지내셨는가!의 의미는 충분해집니다.

그런데 서양사람들의 관습적 표현은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분법적인 구분에 익숙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대림 제2주간 독서와 복음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독서는 이사야서 11장이었는데요, 이렇게 예언하지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이사 11, 1-2) 이런 식으로 육과 영을 따로 표현하고 전달해도 그것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고 또 사람들이 더 잘 알아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을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한국식으로는 이렇게 잘 표현하지 않거든요. 그냥 그것을 보는 것은 내가 행복한 것이지, 내 눈이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의 분리에 익숙하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도 이런 통념적 사고의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굳이 미사 경문을 바꿀까? 아무래도 본당신부님들이 이미 많은 설명을 하셨겠지만, 오늘 우리는 성체조배회 미사를 봉헌하니까 그랬으면 합니다.

원문에 충실하자는 것도 맞고, 다른 나라의 미사 경문들이 모두가, spiritus, Geiste, spirit 이렇게 다 바꾸었기 때문에 한국교회도 보편성을 따라가자, 다 맞지만, 굳이 한국적 개념에 낯선 ‘영’이라는 말을 통상문에 삽입한 까닭을 우리는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다시 재조명하자는 관점에서 접근했으면 합니다.

한국은 육적 인간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지극한 나라입니다. 이게 아주 오래된 것은 아니구요, 아마 전쟁을 겪고 무참하게 가난했던 세월을 관통하며 마치 푸닥거리처럼 한국인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돌덩이와 같은 것은데요, 절대로 가난을 물려주어선 안되고, 가난만 벗어내기만한다면 뭔짓을 해도 상관이 없었던 세월을 지난한 끝에 어떻습니까? 오직 잘 사는 것 하나만 바라보고 올인을 하고 이는 사회로 거듭났습니다.

잘 사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육적 인간이 전부입니다. 좋은 것을 먹어야 하고 좋은 옷을 입어야 하고 좋은 집과 좋은 차를 가져야 합니다. 정말로 우리는 30년 전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먹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며 좋은 서비스를 누리고 있습니다. 풍요로워졌고 잘 살게 되었으며 화려한 것은 쉽게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한국만큼 많은 맛집을 가진 나라가 드뭅니다. 아니지요. 한국만큼 오직 먹는 것만 가지고 방송을 하는 티브이 프로 이렇게 많은 나라가 드뭅니다. 티브이만 틀면 너도 나도 맛집에, 몇 대 천왕에, 냉장고를 부탁하다가 홈쇼핑에서도 스물네시간 먹는 것과 관련된 제품들을 사라고 밤새도록 떠드는 나라입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눈은 맛집 프로그램을 보고 있습니다. 점심 먹으면서도 뭘 걱정합니까? 저녁 뭐 먹지? 이정도 되면 병이지요.

인간이라는 게 죽어서 무슨 소도 아니고, 투플러스니 원플러스니 육질 좋은 고깃덩이를 남기려고 사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우리는 이 육적 관점에서 한치도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뜯어고칩니다. 성형공화국이지요. 제가 독일에 있을 때 2세로 자랐던 아이들이 이번 겨울에도 한국에 옵니다. 오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한국의 성형기술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독일에서는 잘 해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저네들 말로는 테크닉이 떨어진답니다. 그러니 성형하러 기꺼이 온다는 것이지요.

얼굴 뜯어 고쳤으니 그 다음 하는 것은 명품 걸치는 것이지요. 인간이 명품이 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명품을 걸친다고 인간이 명품이 될턱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자신이 없는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뇌를 가방에 담아두고 사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그리고는 남는 관심이 있다면 건강입니다. 수명이 늘어나니 골골 80 살 수는 없잖아요. 젊을 때부터 관리 안 하면 늙어 고생한다고 다들 건강하면서도 건강에 겁을 먹고 삽니다. 저도 병원에 근무하고 있습니다만 뭔 검사를 너무 많이 합니다. 입에다가 카메라 쑤셔놓고 위 대장 찔러대는 것이 몸에 좋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도 매년 그걸 하라고 안 하면 죽는 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허한 겁니다. 천년만년 살지도 못하면서 천년만년치의 고민과 걱정꺼리를 다 짊어지고 사는 모든 중생들에게, 육적 인간이 줄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소멸과 상실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걸치고 성형하고 치료를 해도 결국 육적인간은 소멸되어 갑니다. 그게 싫은 겁니다. 그게 허한 겁니다. 알면서도 자꾸만 더 채우려는 겁니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 제가 한국에 와서 5년 만에 깨달은 바는 이것입니다. 한국 사회는 지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느라, 죽을 때까지 평생을 물만 붓다, 그 독이 다 차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채, 자기는 단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억울해하며 죽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요청합니다. 영의 시대를 다시 출발시켜야 합니다. 영적 관심과 영에 대한 갈망. 내 육신은 죽여도 그 다음은 어쩌지 못하는 이 시대에게, 뭐 좀 없어도 당당하게 살고, 뭐 좀 아파도 자신 있게 살고, 몸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할지라고 그것 때문에 쫄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영적 내공에서 찾아야만 한다! 고 저는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자기 것이 있는 사람이 진짜입니다. 육적으로는 모자라고 궁핍하고 부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영적 진보가 걸림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육적인 결핍이 영적인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더 좋은 현장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깨달아온 사람들입니다.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내가 무엇을 가졌을 때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잃었을 때를 쳐다보면 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가 잘먹고 잘 나갈 때가 아니라 못먹고 못 나갈 때 심하게 맞고 터지고 서러워질 때 그 때 그가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그것은 육이 아니라 그의 영이 지니고 있는 힘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체 앞에 앉아 있는 것은 겁을 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을 더 이상 잃지 않게 해주시고, 나와 나의 가족이 아프지 않게 해주시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다치지 않거나 실패하지 않거나 고통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와 그들에게 영의 힘에 힘을 더하여 달라! 청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그 하느님께서 우리가 더 이상 육의 상실에 두려워하지 말고 겁먹지도 말고 쫄지도 말고, 오직 하느님의 영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사오니, 저를 더욱 영적 인간으로 거듭나게 해주십시오! 이것을 청하기 위함입니다.

성체 조배회는 그런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고, 성체 조배회는 그런 힘을 지향하는 사람들입니다. 전 세계 참 많이 돌아다니며 성체를 받아모셨습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에서 북미주에서 그리고 동양권에서 가는 곳마다 성체를 받아모셨으나, 모두가 똑같은 성체였습니다. 배부르기 위해서 모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가 지치고 힘들어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프고 병들어서 그들을 대신해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영적인 힘이 어디에 있을까, 돌아보니 성체 밖에 없었습니다.

어디에 가시든 조배하시고 가능하시면 한 번이라도 더 성체를 영하시기 바랍니다. 육적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으로 거듭나라는 초대가 바로 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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