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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소리 님께서 남기신 글 (2004-04-16 19:37:16, Hit : 1541)
할아버지 귀신> 성토마스 사도 축일 강론

<할아버지 귀신>

어린 시절, 시골에 가서 외할아버지 제사를 드리던 날, 외할머니는 할아버지 혼령이 들어올 수 있도록 대문을 열어놓으라 하시고 할아버지 귀신께서 식사하실 동안 자식들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하시던 반찬에 젓가락을 수시로 옮겨놓으셨습니다.

할아버지의 식사가 끝나시자 숭늉을 올리시고, 이윽고 할아버지와 함께 오신 동료 혼령들을 위해 생선대가리와 과일 그리고 한 줌의 밥을 신문지에 담아서 대문 밖에 놓으십니다. 할아버지의 혼령이 나가신다고 마중을 다녀오신 다음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지방을 태워 그 재를 물에 타서 마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저의 눈에는 신기하게만 보였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할아버지 혼령이 오셨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할아버지 귀신이 숟가락으로 식사하시고 반찬을 드시고 계시기에 외손주인 저는 무릎을 꿇고 조용히 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제사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있다고 사촌 아이들은 그간 못 먹어본 갖가지 맛 나는 것들을 점찍어놓느라 온통 관심이 가있었지만 저는 얼굴도 모르는 외할아버지 귀신이 드셨다는 반찬들이 도리어 찝찝하게 느껴졌습니다.

무엇을 믿는다는 행위는 그 사람의 존재를 규정짓습니다. 최소한 외할머니에게 이 제사는 살아생전 할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과 추억들이 함께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6.25 동난때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만나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할머니에게 이 제사는 참으로 중요하였습니다. 벌써 달포 전부터 온가족들에게 전화를 돌리게 하시고 갖가지 귀한 음식들을 손수 장만하셨습니다. 결혼 생활 십년에 과부가 되어 50년을 수절하셨지만 이날만큼은 신혼 때의 그 단란함으로 돌아가시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장성하여 훌륭히 키워낸 자식들을 할아버지를 매개로 한자리에 모으는 일이 대단한 기쁨으로 여기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할아버지 귀신이 진짜 오셨는지, 그 동료귀신들도 함께 오셨는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저는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귀신이 진짜, 숟가락으로 밥을 드시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드시는지의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라는 사실을 저는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할아버지의 영혼이 지금도 남아 당신과 그 자녀들을 보살펴 주고 계시기에 우리가 이토록 편히 지낼 수 있음에 대한 고마움과 당신의 자녀들이 우애있게 지내기를 바라시는 할머니의 염려가 고스란히 묻어난 시간이 바로 제사의 본 의미임을 알아차린 것은 나이를 한참 더 먹고 나서였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인 세상에 살다보니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은 마치 비이성적인 미신이나 헛된 신념 정도로 읽혀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오직 보이는 것에 대한 맹종으로 끝간데 없이 치닫습니다.

그러나 역시, 보이지 않는 것이 지니는 가치와 보이지 않는 그것이 도리어 보이는 이 세상을 가꾸어주시고 지탱해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간과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으로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가꾸어오신 분들의 그 귀함이 도리어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더 가깝습니다.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세상에 희망을 걸고 있기에 우리는 더 행복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나를 속일지라도 이 믿음이 있기에 여전히 웃을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아야 합니다.

할아버지 귀신이 오신다는 소리 때문에 무서워 제사에 가지 못한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미신이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는 건방을 떤지 벌써 그리되었습니다. 적어도 여든을 살아오시면서 이 날 하루만큼은 할아버지와의 짧지만 단란했던 추억속에 온통 젖어계실 할머니를 이제는 한번쯤 찾아뵈어야겠습니다.

신부가 무엇인지도 모르시고 그저 장가 안가다는 소리에 불효자식이라고 야단하시던 그 외할머니에게 이제는 저도 "귀신 아버지"가 되었으니 같이 할아버지 귀신 위해 제사나 올리자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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