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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소리 님께서 남기신 글 (2004-04-16 19:39:38, Hit : 934)
환영합니다> 예비신자 받아들임 예식 강론

6개월의 예비신자 기간 중 한 달여를 남겨놓고 이제는 우리 공동체에 당신을 받아들인다는 예식을 거행합니다.

오늘 저녁 미사 후 예식이 있었습니다.

우선, 그 강론을 먼저 올립니다.

첫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물론 저 역시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원래 천주교만큼 새로운 신자를 받아들이는데 까탈을 부리는 종교도 없을 듯 싶습니다. 아니 마음먹고 성당 생활을 하겠다고 어렵게 성당엘 왔는데, "어서 오십시오." 하고 얼른 세례 주고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하면 될 터인데, 이 놈의 성당은 그렇칠 못합니다. 예비자 교리랍시고 반년 가까이를 고생시킵니다. 그러다 보니 함께 교리를 시작했던 사람 중에 많은 분들이 떨어져 나가기도 하시고 '지가 머시라고' 하며 발길을 돌리신 분들도 많으십니다.

왜 그런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단순히 세례를 받기 위해 '공부하는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만은 아닐 듯 싶습니다. 교리 지식이 필요해서 그랬다면 아마 책 읽고 리포트 써서 제출하면 되지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 일은 분명 아닙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저희 천주교에서 세례는 거듭남을 이야기합니다. 새로이 태어남을 이야기합니다.

거듭난다는 뜻은 우선 <내 눈의 거듭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전까지 하느님 없이도 잘 살아왔던 내 시선에서 이제는 하느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먼저 생각할 줄 아는 눈으로 의 거듭남을 이야기합니다.

거듭난다는 뜻은 <내 입의 거듭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저 나의 것을 요구하는 목청에서 거듭나 이제는 이 입을 통해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입으로의 거듭남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거듭난다는 뜻은 <내 마음의 거듭남>을 이야기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나이고, 내 삶의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것들과 눈에 보이는 관계만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세례를 통해 나는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지니는 가치와 내 인생의 주인이 바로 보이지 않으시지만 언제나 나와 함께 사셨던 그 하느님이심을 깨닫는 마음으로의 거듭남입니다.

마지막으로 거듭난다는 뜻은 <내 손과 발의 거듭남>을 이야기합니다. 내 좋은 것, 내 편한 것만 쫓던 발길과 손길에서 거듭나 이제는 나보다는 너를, 나보다는 하느님을 먼저 실천할 줄 아는 손과 발로의 거듭남을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변화"입니다. 이러한 변화, 이러한 거듭남이 없다면 세례는 단지 요식 행위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다른 가치를 받아들이고 고민하고 선택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 시간이 바로 지난 예비자 교리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짧게는 4개월 길게는 6개월에 걸쳐 나의 거듭남을 준비해오신 형제 자매님들이 계십니다. 옛날 초세기 교회, 그러니까 2000년 교회의 시작에 있어서는 예비자 교리 시간이 따로 없었습니다.

당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면 죽임을 당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시절에 천주교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믿어야 하는 종교였습니다. 그래서 따로 교리시간을 두기보다는 천주교 신자들의 모임에 함께 참여하는 기간을 3년 정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3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어떻게 말씀을 나누는지를 보고 3년이 지난 다음 각자가 단단한 각오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일에 그들이 세례를 받길 원한다면 오늘 우리가 하는 이 예식처럼 그들을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받아들이는 예식을 거행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2000년 전의 그 절박함도 없고 박해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때 당시 천주교 신앙인들의 목숨을 빼앗았던 그 칼날보다 더 무서운 유혹과 더 날카로운 위험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쾌락과 탐욕, 증오와 무절제, 그리고 자본주의의 허무와 냉소의 칼날들입니다.

이런 것들 앞에 우리의 신앙은 종종 쓰러지고 맙니다. 넘어지고 맙니다. 지금도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과 내 안의 이런 악의 요소들과 싸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까지 이 자리를 지킨 것은 나 역시 이러한 싸움에 동참하겠노라는 다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천주교 신자라고 모두 잘 사는 것 아닙니다. 천주교 신자라고 모두 안 아픈 것 아니고 눈물 안 흘리는 것 아닙니다. 천주교 신자일수록 가난하고 천주교 신자일수록 아프고 천주교 신자일수록 눈물을 더 많이 흘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은 압니다. 가난과 질병과 아픔 모두를 그걸로 끝내버리지 않는 방법을 압니다. 고통을 고통만으로 끝내지 않고 고통의 참 의미를 깨닫고 고통 속에서 도리어 은총을 깨닫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희 천주교 신자들은 내 안에 있는 나만의 것들과 싸움을 벌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이러한 의미에서 초대합니다. 그간 준비해오신 교리 교육의 시간은 바로 앞으로 내가 투쟁해 나가야할 대상이 무엇인지를 꿰뚫게 하기 위함이었고, 내가 싸워야할 대상이 바로 내 안에 깃들여 있는 악의 요소들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세례성사는 졸업식이 아니라 신앙의 입학식입니다. 교리 공부는 끝이 났지만, 신앙생활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출발하겠습니다. 해놓고서도 몇 년을 계속 제자리 뛰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고, 참 많이 깨치고 배워서 벌써 저 한 참을 달리고 계신 분들도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분들의 삶이 더 행복한가에 있습니다. 그저 세례만 받고 겉만 맴도시는 분들의 삶이 더 행복한지, 나를 버리고 온통 하느님의 기운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려 애쓰시는 분들의 삶이 더 행복한지에 있습니다.

내 것, 내 시간, 내 사람, 내 일, 다 해가며 덤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신앙생활은 그저 보너스에 불과합니다. 보너스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상관은 없는 것이 보너스입니다. 그런 보너스의 신앙이라면 내게 큰 의미가 있을리 만무합니다.

"이제 보너스는 끝내고 내 삶의 중심 속에 하느님을 모셔야 합니다. 내 시간의 배분에 있어서 하느님을 먼저, 내 것이라는 소유에 앞서 하느님의 것이라는 공유를 먼저, 내 사람이라는 집착에 앞서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인식이 앞서나가지 않으면, 앞으로의 신앙생활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몇 년을 신앙생활 하면서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니 신앙생활하면서도 얼굴은 우거지 만상인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기도하고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그 정도의 신앙을 뛰어 넘읍시다. 그런 당신들을 우리 천주교회는 정중하게 받아들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들을 환영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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