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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소리 님께서 남기신 글 (2004-04-16 19:41:18, Hit : 1058)
<순대속 같은 세상살이를 핑계로> 연중 제16주일


순대속같은 세상살이를 핑계로......

언제부터인가 기차나 버스를 탈 때 손에 책이 없으면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지하철을 탈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요즘 처녀들 복장이 웬만합니까? 책이라도 안보면 시선처리를 어떻해야 할지 민망할 경우도 있고 해서, 책이 없으면 하다못해 신문이라도 한 부 사가지고 갑니다.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들을 정리하고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을 떠올리기도 하며 갖가지 상상으로 여유로 왔던 기차나 버스 여행이 제게는 사라져가고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예전에 어느 기자가 일본에서는 버스를 타면 80%의 사람들이 책을 본다는데 우리 나라는 아직 선진국 따라가려면 멀었노라고 개탄하던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8할의 사람들이 버스 안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이 그들의 정신세계가 우리보다 월등하다거나 그 가치관이 더 올바른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네보다 더 많은 불안감을 느끼고 사는 것이 아닐까, 재촉 당하며 사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됩니다.

시간 재테크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1분 1초라도 낭비하지 않고 무언가를 더 할 수 있을지, 그래서 성공할 수 있을지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의 손에는 으례히 영어 단어장이 들려 있어야 모범생이고, 수녀님들의 손에는 묵주가 항시 들려있어야 자연스럽다고 생각을 하고, 직장인들은 출퇴근 버스에서 영어회화 테이프를 듣지 않으면 도태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갖가지 강박관념들, 늘 바쁩니다. 아니 바빠야 합니다.

할머니부터 요즘은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이르기까지도 모두가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저 고해소에서 주일미사 참여 못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물으면 열이면 일곱 여덟은 "바빠서 그랬습니다." 라는 대답입니다.

도대체 왜 이다지도 쫓겨 사는 지를 생각할 겨를조차 주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에서 경쟁은 바로 생존이기에 내가 저 사람보다 나아야 내가 굶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저 사람을 이겨야 내가 짤리지 않는 인성 파괴의 시스템이 당연한 것처럼 이 사회를 만들어버렸습니다.

무슨 대란이 그렇게도 많은고, 무슨 놈의 고비 역시 그렇게 많은지, IMF 때보다 더 위기라는 위협이 팽배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30년 전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더 불안한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도무지 안정적이 못한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매일 부족하고 매일이 불안합니다. 하루하루 그야말로 순대 속 같은 세상살이입니다.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순대 속 같은 세상살이로 한 주간을 탈진해 있다 주일 성당을 찾은 우리들에게 더 없는 위로를 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신이 났을 것입니다. 지난 주 복음내용에서처럼 예수님으로부터 힘든 파견 명령을 받아 떠났던 그들이 돌아와 예수님께 전도여행의 성과를 보고하는 장면을 미루어볼 때 그 분위기는 상당히 고조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받은 능력으로 마귀를 물리치고 병을 낫게 하였으며 이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전하였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성과, 여행담 등을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지니지 않고 떠났던 자신들이 무사히 돌아왔음만으로도 스스로가 대견스럽기도 하고 보고싶던 스승과 동료들을 만나 더 없이 기뻤기에 여행의 피로마저도 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예수님의 마음 역시 조금은 벅찼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염려한 하느님 나라의 전달방식, 가르침의 방식에 대한 확신으로, 그리고 검게 타오르고 한결 수척해진 그들이 안쓰럽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들떠있는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
'그래 고생했으니 가서 쉬어라'가 아니라 조용한 곳으로 가서 나와 함께 쉬자.
내가 위로가 되어주마.
보충이 되어주마. 다시 힘이 되어주마. 한적한 곳으로 함께 가자.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에게도 쉼이 필요합니다. 휴식이 필요합니다. 휴식은 말 그대로 재창조의 시간입니다. 자신의 숨소리를 듣는 시간입니다.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휴가철입니다.

산으로 바다로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휴식을 찾아 떠난 시간 속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바빠집니다. 더 잘 먹고 더 잘 놀기 위해 패턴만 바뀐 채 여전히 바빠야 합니다.

조용한 곳에서 재충전을 하는 것이 휴식인데도, 이름만 좀 났다 싶으면 인산인햅니다. 사람들 발에 채여 3박 4일을 비집고 다니다보면 이건 말이 휴가지, 휴가 다녀와서 한 몇 일은 더 쉬어야 겨우 정신을 차릴 정도입니다.

진정한 쉼은 하느님 안에서의 휴식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쉼입니다. 예수의 이 쉼터에는 울타리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 이것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만 그 쉼을 나누려했던 예수를 앞질러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예수는 이들을 물리치지 않습니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 측은지심 때문에 그들마저도 쉬게 하십니다.

뒤에 이어지는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쉬게 하실 뿐만 아니라 배불리 먹이시기까지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마르코 복음이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예수의 모습은 가르치는 선생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입니다. 예수께서는 종종 '선생님'으로 불렸고, 또 회당에서 가르치는 모습을 볼 때 선생님, 혹은 가르치는 자로서의 예수님의 이미지는 그리 독특한 것은 아니나 그 가르침의 원인이 예수의 <측은지심>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더 많은 희망을 걸 수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 예수는 그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많은 대제관들 율법교사들 바리사이파의 원로들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사람들을 판단하고 죄인으로 취급할 뿐이었습니다. 위로는커녕 불쌍히 여기지 조차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들이 열망하고 있음을 알았고 그들이 지쳐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 측은지심에, 가진 것 없고 각박한 세상살이로 지칠대로 지쳐버린 우리의 피로를 내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것 보다 더 간절히 하느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하느님이 역시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십니다. 측은한 마음으로 이리 와서 좀 쉬어라... 하시며 성전의 고요한 침묵 속에서 나를 기다리십니다.

모두다 휴가를 찾아 떠나버린 이곳 성당에서 단 둘의 조용한 휴가를 제안하십니다.
짤막하게나마 그런 진짜 휴식을 이번 여름 보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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