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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2010-10-04 00:51:53, Hit : 1058)
<헌신과 사라짐> 연중 제27주일

<연중 제27주일>

<헌신과 사라짐>

여러분, 예전 학창시절 중고등학교 때 급훈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워낙 오래전이라 뚜렷하진 않으시겠지만, 저는 그래도 여러분 학창시절의 급훈을 얼추 맞출 수 있습니다. 성실, 협동, 근면, 정직, 노력, 자주, 최선...

하지만 요즘 한국의 중고등학교 벽에 걸려 있는 급훈이 무엇인지, 제 생각에 여러분이 맞추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우선 여자 고등학교에 걸려 있는 것일텐데요, ‘30분 더 공부하면 내 남편 직업이 달라진다.’ 남자 고등학교에는 ‘10분 더 공부하면 마누라 미모가 달라진다.’가 걸려있답니다. 또 재미있는 급훈으로는 ‘대학가서 미팅할래? 공장가서 미싱할래?’, 살벌하지요? ‘지금 이 시간에도 적들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다.’, ‘공부가 밥 먹여준다.’, ‘4시간 서울대, 5시간 연대, 6시간 지방대’, 이것도 압권이었습니다. 급훈 ‘엄마가 보고 있다!’ 그리고 이것보고는 넘어갔습니다. “니 성적에 잠이 오냐?”

치열해진 것 같고, 급훈으로만 봐도 교육이 살벌해진 것 같지요. 한국에서 애 하나 놓으면 그 때부터 그 부모는 “월 백”이랍니다. 무슨 말인가? 물었더니, 애 하나 밑에 달에 100만원씩 들어간다며 툴툴거리는 소리라지요. 그렇게 비싼 돈 들여 교육을 시켜야 하니, 당연히 교육은 본전을 뽑아야 하는 전쟁터가 됩니다. 그러다보니 자연 공부라는 것도 결국 자기의 가치를 올려주는 기획 상품이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 누구나 다 똑똑할 수 없고 다 공부를 잘할 수 없지요. 하지만 저마다 타고난 재주는 있기 마련입니다. 교육은 본래 저마다의 재주를 살려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지요. 모두가 하나의 목표, 서울대, 그리고 삼성만이 출세고 공부의 목표가 되다보니, 잘나든 못나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생에 대한 공부는 등한시된 것입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학창시절 벽에 걸려있던 그 고리타분한 단어들이었습니다. 성실, 협동, 근면, 정직, 노력, 자주, 최선...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이런 가치들은 진부한 것들이 되었습니다.

정직하게 성실하게 근면하게 살면 도리어 무능하다는 타박을 듣습니다. 어지간한 부모 못 만나 근면하고 성실하게만 살면 솔직히 장가가기도 힘든 세상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상실은 한방, 대박, 주식이다 부동산이다 투기로 땀 없이 성실함 없이도 떵떵거리며 사는 꼬락서니들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박탈감입니다. 바르고 성실하게는 살았는데 나만 이렇게 사는 것 같은 허무해집니다.

우리의 허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말 다르고 물 다른 남의 땅에서 어떻게 이만큼씩이나 일구고 살아오셨습니까? 물으면 답은 똑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성실하셨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성실만해서는 못사는데 이곳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 성실하기만 하면 풍족하지는 못해도 함께 먹고 살 수는 있는 나라니까!

그런데 내 자식들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들 눈에 비친 부모의 삶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바보처럼 일만 한, 당신 것 하나 못 챙기시고 가족들에게 헌신만 한 세월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부모처럼 살기를 싫어합니다. 이게 문젭니다. 악착같이 모았던 부모와는 달리 쓸 것 쓰고 놀 것 놉니다. 그러면서 세상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어떻게 엄마 아빠처럼 살 수 있냐고, 나이가 차도 결혼할 생각들도 않습니다.

하지만 부모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세상이 제 아무리 영악해 한 방을 노리고 대박을 꿈꾸어 부귀영화를 누린다할지라도 그것이 결국 헛되고 허무하다는 사실을, 이기기 위해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쓰고, 아부와 허세를 부리는 것이 겉으로는 화려해보이지만 그 속내는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모래성처럼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모는 알지만, 그것을 도무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월이 더 흘러야 합니다. 이 세상이라는 것이 강하고 화려하게, 한 방을 터뜨린 인간들이 득세를 하고 마치 그들이 주인인듯 보여도, 결국 이 세상이 빚어지고 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세상에 해가 뜨게 하고 세상 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무엇 하나라도 들어가게 하는 것은, 성실하고 묵묵하게 지금도 소리 내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더 많은 이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세월이 더 흘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조금 더 세월이 흐르게 되면 그 때 가서 또 깨닫겠지요. <하느님의 성실함>을 말입니다. 나의 죄와 나의 허물과 나의 게으름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단 한 번, 단 한 순간도 끊임없이 나를 빚어오고 계셨다는 사실을, 그분은 나를 창조하신 후 나를 내버려두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이, 지금 이 순간마저도 나를 거듭거듭 창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하느님의 성실함이 계시기에, 그렇습니다. 세상은 지금도 창조되고 있습니다. 한 방과 대박을 노려 산과 강을 파 엎고 생명을 더럽히는 인간들이 난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그분은 우리에게 오늘처럼 푸른 하늘을 보게 하시고 아찔할만큼 찬란한 햇살을 만나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성실하심>말고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신비를 우리는 매일매일 깨닫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닮자!>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는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계약에 성실하신 하느님, 반항과 나태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단 한 번도 사랑과 자비를 거두신 적이 없으신 하느님의 성실함을 닮자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특히 독일 땅에서 이만큼 삶의 자리를 든든히 지탱해오신 여러분들의 성실함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유혹도 많았을 것이고 고통도 적지 않았을 것이나 바르고 성실하셨기에 키 작은 동양인으로 살면서도 욕은 안 얻어먹고 내 자녀들 당당히 길러내신 자랑스런 분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의 넋두리를 들을 때 가슴이 아픕니다. 나만 바보같이 이렇게 산 것 같고, 부모형제 다 봉양하고 지금은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는 소리가 신세한탄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바르고 성실하게 살았으면 그에 맞갖은 상급도 있어야 하는데 이게 뭐냐? 이제는 힘도 없고 사람도 떠나고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는 하소연에 명치 끝이 짠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다시금 여러분의 믿음을 더 해드리는 강론을 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믿음을 더 해달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더 해달라고 청하는 믿음은 우리도 당신처럼 어떤 신통력을 부릴 수 있는 그런 능력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고 싶은 믿음이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것은 그런 신통력, 기적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의 능력을 주신 것이고 그분은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지금 함께 살고 계심을 깨닫는 삶이자 실천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자, 부모와 함께 삽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부모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부보의 뜻을 소중이 받들며 살아야 합니다. 함께 계시는 부모를 무시하고 자기 위주로 살면 그것은 불효이고 패륜이입니다. 반대로 자녀를 키우는 부모도 자기 위주로 살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기 위주로 살면 자녀들은 제대로 자라지도 못하고 성숙하지도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헌신입니다. 본래 인간의 본성은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당연한 존재이나 그것만으로는 인간이 인간이 되지 못함을 압니다. 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 곧 헌신의 사랑을 받고 함으로서만 참된 인간이 됨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사랑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내 자식, 내 부모에게만 헌신했지만, 예수께서는 그 헌신을 나와 상관 없는 이들, 이웃들에게도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시게” 하자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에 반대했습니다. 사랑 받고 헌신 받을만한 사람들을 가린 것이 첫째 이유요, 둘째는 내 할 바를 다했으면 응당 그 댓가로 구원을 누리는 것이 신앙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 신앙에는 대단히 성실한 사람들이었지만, 사람들을 위한 헌신에는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내가 한 것이 있으니 받는 것이 당연하고, 내가 이만큼 했으니 그만큼의 보상은 주어져야 하는 것이 그들의 신앙이고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하면서도 결국 저 하나 잘되자는 신앙을 넘어서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유대교의 신앙을 뛰어넘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으로 건너갈 것을 제안합니다. 첫 번째는 보상으로서의 헌신과 상급으로서의 성실함을 구하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니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온 나의 삶마저 허무하게 느낍니다. 아니 될 말입니다.

우리가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그러지 않습니까?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하바 1,4) 여러분이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오셨다면, 보상과 상급과는 전혀 무관하게 여러분은 삶은 충분한 의미를 지닙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인 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큰 위로와 상급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자꾸만 독일에 살아서 겪게 되는 허무와 공허를 괜히 꺼내지 마십시오. 내가 살아온 세월이 미안해지고, 내가 이겨냈던 고통이 부끄러워지는 일입니다. “아무 소리 하지 마라! 너네들은 그렇게 땅 부자고 돈 많아서 떵떵거릴 지라도, 나는 내 바르고 성실했던 삶으로 하느님께 <복된 의인>이었노라는 대접을 누릴 것이다!” 그렇게 자신하십시오. 허무해하지 마십시오. 성실하신 하느님을 실망시켜드리는 일입니다.

여러분. 내가 한국에서 살았던들 독일에서의 고생만큼 안 했을리 없고, 한국에서 살았던들 이 나이에 겪어야 하는 그 허무와 공허를 피할 수도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나이가 되시면 그 허무와 공허를 채우기 위해 자꾸만 세상의 것들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것은 죄다 다 채워야 할 것 같고, 더 늙기 전에 볼 것 더 보고, 먹을 것 더 먹고, 재미와 놀 것은 더 채워야 허무를 이길 것이라고!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그 또한 헛되고 헛되다... 그렇다고 한들 그 공과 허를 채울 재간은 어디에도 없지요. 부족한 그 자리를 채우는 비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망망대해 건너 남의 땅에서 든든한 내 자리 잡고 살아오신 그 비법, 성실함으로 육신의 자리를 든든하게 세우셨듯이, 이제 여러분 영혼의 든든함을 <하느님 앞에서의 성실함>으로 영혼의 자리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망망대해, 부표처럼 떠다니지 마십시오. 이제 하느님 앞에서 성실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 주십시오.’의 댓가나 보상이 아니라, 그저 나의 성실함 마저도,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그 수준을 부디 이루시기 바랍니다.

잠시 이 세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려하고 자신만 소중하게 생각하며 산 세월이 적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느님의 힘까지 빌려서 나 한 사람 잘 되는 길을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 앞에서 다시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방식, <헌신과 사라짐>의 길을 받들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종이 주인에게 봉사하듯, 봉사한 후에,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며 물러나라, 하신 후 당신 자신이 그리하셨습니다. ‘땅에 떨어진 밀알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 하신 그 이후 당신 자신이 조용히 죽는 밀알이 되셨습니다. 드러내지 않고 생명의 저 변방에까지 물러날 수 밖에 없도록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다가 묵묵히 죽으신 분이었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그저 저는 해야할 일을 다 했을 뿐”이라며, 쓸모없는 종과 같이 세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공허와 우리의 허무를 이기는 비결 중에 비결입니다.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돋보이게 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자기를 상품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섬기는 일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집착할 때 모든 공허는 거기에서 쏟아집니다. 묵묵하고 성실하게 하느님의 자리를 지키는 일입니다. 내 인생에 성실했듯 이제는 하느님 앞에서 성실하는 일입니다.

오늘 피정을 끝낸 청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에게는 수많은 일이 파도처럼 닥칠 것입니다. 그 때마다 여러분, 하느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성실한지를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 모든 험난한 파고를 이겨낼 것입니다. 신앙이 기둥 되게 하시고 믿음이 방주가 되게 하십시오. 기도하는 법을 익히셨으니 이제 그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성실한 사람입니다.

저도 성실한 사제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서 성실한 사제이고 싶습니다. 이 미사가 끝나고 저는 야고보 사도의 순례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떠납니다. 하느님 앞에서 성실한 먼저 되어야 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옛날 우리들의 교실에 걸려 있던 그 급훈처럼 부디 저를 하느님 앞에서 성실한 사제일 수 있기 위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성실함으로 바름으로, 하느님께만 우리 모두 인정받는 신앙인들 되어 다시 만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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