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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2011-01-23 09:27:53, Hit : 1063)
<눈 먼 자들의 도시> 연중 제3주일

<연중 제3주일>

<눈먼 자들의 도시>

독일이 여러 가지로 의미로 선진국이라고 생각되는 것 중에 하나가 ‘지방 분화’가 잘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매트로폴리탄(Metropolitan)’이라고 부르는 인구 천만 이상의 도시도 없을 뿐 아니라 큰 도시든 작은 도시든 교육과 의료 문화의 ‘인프라Infra’들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것이 이상적으로 보입니다. 요즘 독일의 젊은 사람들도 대도시를 찾아 떠나고 있지만 한국처럼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집중되는 현상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스운 일이지요. 조그만 땅 덩어리에서 전체 인구의 1/4이 서울이라는 조그만 동네에 집중해서 살고, 전체 인구의 절반이 그 인근 수도권에 산다. 당연히 교육, 경제, 의료와 문화는 수도권 집중현상을 낳을 수 밖에 없지요. 그래서 한국에서는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서울 가야 사람 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인구 천만 명이 350만 명 사는 베를린보다 작은 곳에서 복작거리며 삽니다. 거기서 쏟아내는 엄청난 오염을 땅 속으로 쏟아 부으며, 서울에 내리는 순간부터 매쾌하고 탁한 공기에 숨쉬기도 어렵다 하면서도, 사람들은 서울을 떠나지 않습니다. 서울 사람이 되어야 잘 살 수 있으니까, 그래서 서울말을 쓰고 서울 사람 흉내를 냅니다.

학생들도 그렇습니다. 지방에서 난 학생들도 거의 대부분이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고 싶어합니다. 지방 출신은 어디가도 인정받기가 어렵고 일자리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지방 출신인 것을 표를 내지도 않고 사투리도 저처럼 하나도 쓰지 않습니다. 사실 저도 서울에서 났거든요, 그래서 제가 완전히 서울말을 잘 쓰지 “않나요?”

저는 사투리를 안 쓴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유학생들이 저의 말투를 흉내 내는 걸 들어보면, 촌놈 촌놈 이런 경상도 촌놈이 없더만요. 하기야 평소에 서울 출신인 듯 서울말만 쓰던 예쁘장한 여자 유학생이 있었는데 어느 날 설거지를 하러 주방에 들어와서는 자기도 모르게 한다는 말이, “신부님, 따신 물 나와요?”, “뭐 따신 물? 니 고향 어디고?” 유학생은 들켰다는 듯이 “부산요.” 합디다.

이렇게 교통이 발달되고 문화가 고도로 확산된 현대의 사회에서도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수도와 지방의 수준차이는 엄청납니다. 그리고 갈수록 지방의 살림살이는 고갈되고, 어디에 사는가에 따라 인간의 질이 달라진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옛날에는 어땠겠습니까? 이것보다 더 했을 것입니다.

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져 있던 예수님 시대에 중앙수도 예루살렘은 절대 권력의 도시였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 역시 전체 인구의 46%가 살고 있을 만큼 이스라엘도 한국 못지않은 수도권 편중이 심한 나라입니다. 과거에는 더 그랬겠지요. 특히 이방민족과의 교류를 엄격하게 금했던 당시의 풍속을 감안하면 예루살렘에 살고 있지 않은 지방 변두리 지역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이방인 취급을 하던 기고만장한 시절의 이야기가 오늘 복음의 배경입니다.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셨다.’(마태4,12)

4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전하는 바, 세례자 요한의 체포는 예수님의 활동 개시의 신호로 여겨집니다. 이는 요한을 통해 준비되었던 하느님 나라의 선포가 예수의 활동으로 이어지는 밑그림도 똑같고, 그의 첫 선포가 수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방 갈릴래아를 굳이 찾아가서  회개의 선포가 시작되었음도 일치합니다.

‘갈릴래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시다시피 갈릴래아는 이스라엘 최북단의 변방지역이었습니다. 변방지역들이 갖는 특징들이 있지요. 무역이 활발하다거나 혹은 혼합된 문화양식을 보인다거나... 하지만 이러한 특징이 그 시대의 소위 ‘서울 사람’인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갈릴래아는 더러운 곳, 이방의 나라와 살을 섞고, 우상숭배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으며, 늘 침공과 박해의 교두보가 되는 이방인들의 지역이라고 멸시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이방인’이라는 꼬리표가 갖는 적대감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방인들은 상종 못할 사람들이고 함께 식사를 한다거나 말을 붙여서도 안 되는 그런 존재들이었고, 서울 사람, 하느님의 선택받은 땅 시온성 예루살렘에 산다는 사람들은 변방 갈릴래아 를 그런 이방인으로 취급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갈릴래아 사람들”...이라는 표현 자체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편견과 경멸을 드러내는 수단이었으며, 마치 ‘경상도 보리문디’, ‘전라도 깽깽이’하는 식의 한 지역을 폄하하는 정도를 넘어, 못 배우고 무식한, 그래서 하느님의 율법도 지키지 않는 죄인들의 땅, 캄캄한 어둠과 그늘진 한의 땅으로 몰아세웠던 것입니다.

성서 곳곳에도 갈릴래아에 대한 이러한 적개심과 비아냥거림은 여과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사람이란 말이오? 성서를 샅샅이 뒤져 보시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요한 7,52) “당신도 갈릴래아 사람이니 틀림없이 예수와 한 패일꺼요”(마르 14,70) “어떻게 그리스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리 있겠소?” (요한 7,41)

이런 땅 갈릴래아입니다. 가난해서 눈물의 땅이요, 서러워서 한의 땅이요, 죄가 많아 소외되고 버림받은 버린 땅, 그런 갈릴래아입니다.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죽어지내던 그런 어둠의 땅 갈릴래아를 선택한 사람이 바로 ‘예수’였습니다.

화려한 곳, 성공이 있고 광명이 있고 능력 있는 사람 잘 나간다는 사람들이 모인 땅 서울,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 악을 쓰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래서 거기서 떨어지는 떡고물이라도 얻어먹기 위해 경쟁하듯 기생해야하는, 그래서 돈에 눈 멀고 성공에 눈 멀고 탐욕과 쾌락에 <눈먼 자들의 도시>, 제 편한 것이 먼저이기에 냉소적 개인주의로 점철되어,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금방 무덤덤해지는, 지난 15일 한국의 한 도시, 하루에 수백 명이 찾는 도심의 찜질방에서 60대 여성이 죽어 부패가 되는데도 아무도 눈길 주지 않고 이틀이 지나서야 신고를 할 정도로 삭막해져가는 도시의 구조를 마다하고,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도시 예루살렘이 아니라 더럽고 어두운 갈릴래아 그곳을 기꺼이 선택하십니다.

바로 거기에서 구원의 첫 삽을 뜨십니다. 몸소 <갈릴래아 사람>이라 불리길 원하시며 그 바닥 제일 밑으로 내려가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배가 고파 찾아오는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십니다. 아무도 고쳐주지 않는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예수께서 베푸셨던 33가지의 기적 중에 24번의 기적이 바로 이 갈릴래아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가 뽑았던 열두 제자 중 열한 명이 갈릴래아 사람들이었습니다. 단 한 사람, 갈릴래아 출신이 아니었던 제자는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만 가리옷 사람이었습니다.

그 병들고 가난한 삶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그 사람들의 눈을 들여다보시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온화함의 눈길로 당신만을 바라보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0)

멸시받고 핍박받던 사람들... 세상의 어두움을 찾아오신 그분을, 어둠 속에 던져졌기에 그래서 그들은 빛을 가장 먼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즈불룬과 납달리, 호수로 가는 길, 요르단 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이사 8,23) 하신 말씀이 참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갈릴래아’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 아무도 모르게 가슴 속 아주 깊이 꽁꽁 감추어 놓은 나만의 갈릴래아, 나만의 십자가들... 누구도 모르는 눈물이 있고, 말그맣게 도려내고 싶은 상처와 한숨의 갈릴래아도 있습니다. 어두운 그곳, 버리고 싶은 그곳, 잔뜩 숨겨놓은  부정할 수 없는 내 역사의 갈릴래아... 바로 거기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자리입니다.

예수께서는 거기를 제일 먼저 찾으십니다. 너무 힘들어 울고만 싶은 그 어둠이 있었기에 도리어 나는 빛을 보고 빛인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갈릴래아가 지닌 역설입니다. 스스로 빛이라 자부하던 영광의 땅 예루살렘 사람들은 결코 깨닫지 못한 그 빛을, 그래서 빛이 오자 그 빛을 도리어 죽여 버린 <눈먼 자들의 도시>는 끝내 예수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발견하는 자리는 언제나 어둠 속에 홀로 선 저 갈릴래아의 십자가에서 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인생의 십자가들을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상처가 되었든, 내 사람이 되었든, 내 병고와 나의 죄가 되었든, 고통스럽지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끌어 안으십시오.  

그 속에 빛이 있고 그 속에 구원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너무 힘들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나의 이 십자가 때문에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그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기도한 사람들임을 잊지 마시고, 끝내 그 십자가 때문에 매달린 사람들임을 잊지 마시고, 그리고 마지막 우리는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에 이 시절까지 이렇게 견디어낸 사람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가 없이, 갈릴래아 없이, 오로지 성공만, 높음만, 이김만, 안락과 행복만 꿈꾼다는 일은 그야말로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예수를 찾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희생도 용서도 화해도 모르는 비정한 도시가 아니라, 어둠 때문에 빛을 알고, 고통 때문에 사랑을 알며, 가난 때문에 자비를 베풀고, 희생 속에 담긴 보람을 간직하게 만드는, 갈릴래아, 우리들의 십자가 아래서 우리는 예수를 만날 것이고, 또 그렇게 예수를 닮아갈 것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도다.”(마태 4,17)

다시 우리의 갈릴래아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다시 우리가 버렸던 십자가를 품어냅시다. 우리가 단정짓고 포기했으며 냉대했고 버렸던 가장 가난한, 가장 소외된, 가장 없는, 바로 그곳 그 사람을 찾읍시다. 우리는 그곳에서 이미 먼저 와 계시는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아멘.

요셉 신부님 오늘 강론 크기를보니 건강을 회복하신것같습니다
차디찬 독일 겨울날씨는 독일소주 한병를 비워도 취기가 오지않을 정도죠
나일강변에서 강바람과 도심의 향기에 취하여 소세지 하나로 소주한병을 다마셔도 취하기보다는 한기마져 가시지않을 날씨가 독일의 겨울입니다
아무쪼록 강건하시어 매일 광야의 메세지를 숙독하게 하여주소서
아멘~~
  2011/01/24  
김묘순 리디아 신부님, 저 베드로 수위권 성당에서 독서도 하고 갈릴래아 호수에서 배도 탔어요. 갈릴래아 호수에서의 눈물의 의미를 여기에서 찾습니다. 저는 언제쯤이면 눈에 보이는 진실보다 본질을 볼 수 있을까요?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라며...   2011/01/24  
안토니오 말씨하면 생각나는 말 - "사람 환장합니다"
노무현이 그렇게 갈구했던 '지방 균형발전'은 헛염불되고 갈수록 대한민국은 '서울공화국'.되어간다.
'갈릴래아'와 우리나라의 '광주'가 자꾸 오버랩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조신부님의 강론이 사람 '환장하게' 듣고싶은 날들입니다. 언제쯤이나 환국하게 될까요? 휴~
  2011/01/25  
조웅현 "그렇게 예수를 닮아 갈것입니다."아멘!   201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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