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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2016-11-17 08:46:02, Hit : 325)
<신앙의 생활>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INTRO)
매일미사 책에 오늘 축일을 맞는 엘리사벳 성녀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합니다. ‘헝가리의 공주로 태어나서 남부럽지 않게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많은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물론 당시 일반인들 중에서도 그 정도의 기도와 자선생활을 했던 이들이 적진 않았을 것이나, 공주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였기에 성인이 되셨다... 정도의 표현이라면 중세기적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하겠습니다.

요즘 한국이라는 시대엔 공주...라면 그 자체로 끔찍합니다. 정치가 되었든 종교가 되었든 권력화된 모든 것은 부패한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한국의 공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공주임에도 불구하고...라는 중세기적 표현이 그럭저럭 동화로라도 회자되던 900년 전의 세상이 차라리 순수하기라도 하지 않았을까? 공주님의 축일 날 빌어봅니다. 잠시 침묵으로 이 시대를 위하여 기도하며 미사를 준비합시다.

(강론)

<신앙의 생활>

신앙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라 단선화시키고, 그 믿음을 사고(신학)와 생활(신심)으로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다면, 결국 신앙의 성장은 하느님에 대한 사고와 생활이 돈독해져가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신앙이라는 것을 믿냐, 안믿냐. 믿으면 어떤 하느님을 믿냐? 따위의 신학적 수사로만 전개해 버린다면 신앙은 머릿속 사유의 대상일지는 몰라도, 신앙 때문에 진보되고 성장되는 <생활>의 차원으로서의 신앙은 답보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신앙과 그 생활에 대한 성장은 내가 믿는 하느님에 대한 진술에 있지 아니하고, 부르심에 대한 구체적 응답의 순간들의 체내화를 통해 심화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구체적 응답의 체득 말이지요. 그분은 끊임없이 나를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어떤 지경이라 할지라도, 내가 어떤 상태와 죄악에 물들어있다 할지라도.

하지 말라는 단 한 가지의 일마저 깨뜨려버린 아담도 그분은 찾으셨고, 피붙이 동생을 들로 가서 때려죽인 카인을 찾으셨으며, 살인범으로 도망친 모세도 떨기나무에서 찾으셨고, 금송아지 우상을 섬긴 그 이스라엘마저 다시 찾으셨습니다. 그 때. 그 순간 대답하는 것입니다. ‘네, 여기 있습니다.’

신앙은 바로 그 순간들에 있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어떤 지경이라도 알아듣고 제 때에 응답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비단 이것은 구약의 전통을 넘어 우리의 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자신들의 일대기 속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기도를 바쳤나 돌아보지 마시고 내가 얼마나 그분의 부르심에 유효하고 적절하게 응답하며 살았나를 돌아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망쳐버린 그 순간들... 나는 죽어도 하기 싫고, 할 수도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 부르시고 그분이 원하시니! ‘너 어디에 있느냐?’는 발견에, “네,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끝내 내 몸을 일으켰던 순간들.

그것들이 주로보면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상처 속에서도 치유를, 실패와 낙담과 좌절 속에서도 <차라리 내가 죽어, 남을 살리려던 그 애씀들>이, 돌아보면 훗날 내가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네,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했던 ‘신앙 생활’의 시간들이었음을!

오늘 예루살렘을 보며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눈물 흘리시는 그분 울음의 소리를 더 가까이서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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