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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2017-11-02 09:08:29, Hit : 393)
<공문> 위령의 날

<위령의 날>

<공문>

병원에서 일하다보니, 교구에서 보내는 공문들의 대부분이 본당 사목과 관련된 것이어서 제게 유의미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이런 내용이 있구나... 확인하고 넘어가는 것이 통상적인데 유독 한 공문이 눈에 띕디다.

<매장묘의 만장에 따른 사제 장례절차 안내>에 관한 공문이었습니다. 지난 10월 세상을 떠나가신 故 백응복 신부님을 끝으로 부산교구 사제들의 매장묘가 만장에 이르게 되어, 앞으로 교구 사제의 장례는 모두 화장하여 납골당에 봉안되는데에 필요한 절차를 주교님께서 공문으로 보내신 것이지요.

두 분의 주교님 모두, 당신들도 죽으면 매장하지 않고 다른 사제들과 함께 순서대로 납골당에 안치되겠다 공언하신데로, 화장예식에 참여하지 않는 신부들은 개별적으로 식사할 것, 그리고 봉안예식에 따로 참여할 신부들도 교구에서 별도로 밥을 주지 않으니까 개별적으로 식사 해결하고 봉안예식에 참여하라, 는 정도의 공문이었습니다.

주교님도 유별나지. 신부 하나 죽었으면 그냥 밥 한끼 나눠 먹자 해도 될 것을 굳이 공문씩이나 내서 밥 따로 안 주니까 알아서 식사하고 봉안예식 참가해라! 는 공문을 보며, 어쩌면 문득 이것이 주교님의 유언일 수도 있겠구나... 나 죽으면 이렇게 해라. 그리고 우리들 죽을 때 신자들에게 폐 끼치지 말고 조용히 한 줌 재 되어 마련해놓은 항아리에 곱게 들어가자!는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따지고보면 이미 살아 죽을 자리가 정해진 사람들입니다. 어디에서 죽을지는 정확치 않아도 어디에 묻힐지는 확실해진 것입니다. 죽고 묻힐 자리가 명확한데, 안 그렇습니까? 그 작은 항아리에 갖고 가지도 못하는 것 이고지고 너무 아등바등 거릴 일이 아니다... 싶습니다.

묫자리 봐 놓고 사는 사람들이 뭐 못할 것이 그리 많고 죽어도 안되는 것이 그리 많타 하겠습니까? 순서대로 화장장에서 납골당까지, 내 죽는 길에 따라오는 사람들 더운 밥 한 끼 대접도 못하고 가야하는데, 아직 심장 펄떡일 때 아직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명확해지는 듯합니다.

죽지 못해 살지 아니하고, 죽기 싫어 살지 아니할 것입니다.
다만 죽을 때까지만 살겠습니다.
그리고 사는 동안 어떻게 죽을지를 잘 결정하며 살겠습니다.

화장장에 들어서면 바라보게 될 마지막 하늘.
어쩌면 오늘도 기억나겠지요. 그리고 당신도 생각날 것입니다.
저는 이미 참 고마운 인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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