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 1/22 회원가입회원로그인
  View Articles
 님께서 남기신 글 (2018-10-04 16:17:15, Hit : 263)
<우리가 예수를 사는 이유는> 모라 성요한 성당 견진 강의 03

(모라 성 요한 성당 03)

<Drei. 우리가 예수를 사는 이유는?>

1.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 우리가 왔던 지난 이틀을 반추해봅시다. 첫날은 우리가 예수를 찾아야 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왜 우리에게 예수가 필요한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우리는 무엇이 다른지.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찾는다고 할 때 그것이 전달되어지고 표현되어지는 신앙의 언어들은 적확한지를 물었습니다.

어제 우리는 우리가 찾고 믿는다는 예수는 과연 어떤 분인지?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예수에게 회칠해놓은 금색을 벗겨내고 조금 더 인간적인 예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 죄인들, 병자들, 세리들, 창녀들, 예수가 사랑했던 사람들 그들 중에 그 누구도 하느님의 나라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던 예수. 그래서 저 사람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요, 술꾼이요 먹보라고 놀림을 받았던 예수. 아흔 아홉 마리를 버려두고 한 마리를 찾아나서시고, 재산을 말아먹은 아들을 이미 버선발로 나가서 맞이해주던 그 예수는 바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신성모독죄로 살해를 당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찾는 예수. 우리가 믿는 예수는 바로 그 예수라는 사실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마지막 날입니다. 찾고 믿는 예수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함께 살아야 하는 예수는 그냥 우리가 아는 예수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예수로 나아가야 하는데, 바로 이 지점. 곧 예수와 함께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숱하게 회개에 대하여 요구받았고 일년에 적어도 두 번이상 양심성찰을 하고 판공성사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매번 미사 때마다 내탓이요 가슴을 치며, 좀 더 다르게. 지금보다는 같지 않게 살고자 이토록 노력해온 세월이 헛세월이 아닐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산다는 일. 내가 바뀌고 내가 변화해야 함을 알면서도 도대체가 그것이 되지를 않는 마지막 꼭지 앞에 서서 오늘 우리는 그렇다면,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어떻게 변화하고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견진. 성령과 함께 하는 신앙인들에게 아주 좋은 규준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들도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이 대단히 연약하고 대단히 약했던 인간군상들이었으니까 말이지요. 그랬던 그들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었고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람들,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울 수 있었던지를 찾아간다면. 이번 주일 받게 되는 견진성사가. 그 이후 내 삶을 어떻게 정향시켜 가야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이것이 저의 바램이고 제가 여러분에게 꺼내놓을 제 계획입니다.

신앙의 구조. 곧 신앙의 언어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우리가 찾는 그분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마지막은 아시다시피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살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분입니다. 죄인들, 세리들, 병자들, 창녀들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라 선포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가까이에 둔 사회질서의 파괴자였으니까요.

그리고 다들 잘 아시는 것처럼. 그분은 세상이 만들어놓은 근간을 뒤흔드심으로 당신 자신도 죽을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죽임을 받아들이십니다. 오늘은 그 이후의 시간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의 죽음으로 제자들이 변화된 것이 아님을 명심합시다. 예수의 죽음 이후에 그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똑같았습니다. 제 살자고 도망쳤고 먹고 살기 위해서 다시 밥줄 지키는 일에 나섰던 인물들입니다. 죽음 때문에 그들이 안게된 것은 약간의 부채의식? 그리고 죄책감? 이정도 수준이었고, 그것으로는 예수가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며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을 만들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이 발생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야 하는 부활입니다. 자꾸만 분량에 실패하기 아주 많은 분량을 건너뛰고 말씀드리지요. 부활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 그대로 예측할 수 없었던 하느님의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부활에 대하여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지요. 부활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활의 증거는 무엇이지요? 그분께서 부활하셨다는 대단히 주관적인 주장과 그리고 빈무덤 뿐입니다. 이것만으로 부활이 역사적 사실로 판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쁘지만 이것은 짚어야 하겠습니다. 먼저 부활에 대한 주장을 살펴봅시다. 나중에 여러분들이 성경을 펼쳐들고 꼼꼼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각 복음서마다 부활의 정황에 대한 보도들이 다 다릅니다. 마르코와 마태오는 부활하신 분의 발현이 갈릴레아에서 있었다고 하지만 루카는 예루살렘에서 발현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르코는 빈 무덤을 찾아간 여인이 세명이지만, 마태오에서는 두 명입니다. 루카는 무덤에 간 여자들의 숫자는 말하지도 않고 여인들이 걱정하던 무덤의 돌도 이미 굴러져 있는 상태라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최소한 부활에 대한 증언들이 각 복음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각각의 공동체가 일치된 견해를 짜맞추기 위하여 조작하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최소한 부활을 거짓으로 조작해낸 것이라면 그것 때문에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활을 발설하고 증언함으로서 이득을 본 사람이 누구였지요? 모두가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살기 위해 도망쳤던 사람들에게 무언가! 어떤 일이 구체적으로 벌어지지 않았다면 절대로 발설하지 않았을! 아주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있습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가장 중요한. 예수를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돌아와 부활하신 그분을 설교했던 사실이나, 예수를 만난 적도 없었던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극적으로 전향한 사건은 원천적으로 설명이 되지를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 일치되지 않는 증언. 이해되지 않은 변화. 전혀 짜맞추어지지 않는 정황들은 오히려 부활이 저마다 각자의 신앙 영역 안에서 어떤 식으로도 구체적으로 작용하고 또 작동하였음을 드러냅니다. 바로 증언과 실천. 그들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 비로소 부활은 그들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부활이 무엇인지가 드러나고 발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거기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있습니까? 무엇이지요? 자.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도 곧바로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죽으셨던 그분이 다시 살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죽으셨던 그분을 다시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누구는 여전히 믿지 못했으며!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으로 그분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죽으셨던 그분을 다시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어부살이 할 생각만 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획기적으로, 완전히 돌변한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령강림. 그분이 떠나가시고 50일이 되던 날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지요.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채웠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차서 성령이 시키시는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1-4)

이 성령 강림의 사건이후에 그들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들 자신의 힘이 아니라. 성령.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힘. 하느님의 숨결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심을 체험한 그들은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대신 살아가는 사람들로 완전히 탈바꿈을 하게 되지요.

이번 주일. 견진대상자 여러분이 받게 되는 견진성사의 두 가지 중요한 마떼리아, 질료는 첫 번째가 기름바름입니다. 세례때는 물로서 죄를 씻고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남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견진성사 때는 기름. 크리스마 성유. 곧 그리스도의 기름을 바릅니다. 씻고 기름을 바름으로서 완전한 자녀됨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성령의 임재.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기름을 통하여 당신과 함께 계심을 확증하는 중요한 도구로서 기름을 바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주교의 안수입니다. 안수를 통하여 견진을 받은 사람은 교회공동체와 완전히 일치됨을 드러냅니다. 또한 주교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의 일곱가지 은사를 온전히 받게 된다고 일찍이 교부들은 믿고 가르쳤습니다.

주일날 여러분들에게 주어질 기름바름과 주교의 안수가 갖는 결정적 장면들을 미리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물론 전례로서 이것은 진행될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흘러가버리는 사건의 하나로 치부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행위들이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성령의 임재. 성령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작업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 크리스마 성유는 여러분 인생에 가장 마지막에 바르는 순간!

성령께서 견진성사를 통하여, 주교의 안수와 기름바름을 통하여 나와 함께 계심을 다시 한 번 드러내신다! 라고 할 때. 그렇다고 한다면 견진성사를 통하여 누리게 되는 성령의 은총생활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성령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성령을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는 바로 프뉴마입니다. 이 프뉴마, 히브리어로는 루아흐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현존. 곧 하느님의 숨결,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힘, 하느님의 기운 등으로, 하느님의 구체적인 현존을 드러내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태양과 햇볕을 나눌 수 없듯이 그들도 하느님과 하느님의 숨결을 나누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절에도 프뉴마가 나옵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위를 감돌고 있었다.” ☞ 공동번역 “하느님의 기운”

이렇게 성경의 사람들에게 성령은 곧 <하느님의 구체적인 현존>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났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과 부활로써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보여주셨고 그리고 떠나가셨습니다. 이제 남은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서 깨우치게 된 하느님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힘도 용기도 재주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알았지만 그 현존을 체험하고 전할 수 있는 은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이 사람들은 하느님의 은총, 하느님의 현존을 ‘성령’이라는 대단히 직접적이고 체험적인 하느님으로, 성령의 현실화, 저는 이것을 성령의 ‘인격화’를 이루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이 곧 하느님시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통하여 지금도 우리와 함께 일하고 있다는 인식이 바로 사도들의 깨달음이었던 것입니다. ---> 그러니까 성령의 목적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하느님 현존의 체험으로서 새로운 생활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한 번 헤아려봅시다. 고린토 전서 12장과 갈리디아서 5장을 보면 성령의 은사 9가지와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가 분류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 아홉 가지는 지혜, 지식, 믿음, 치유, 능력, 예언, 식별, 신령한 언어, 그리고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 이렇게 아홉 가지이고, 그 은사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자비, 온유, 절제, 겸양, 성실. 아홉 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늘어놓으면 그게 뭔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성령을 받고 변화되었던 초세기 제자들 삶으로 한 번 들어가보도록 합시다. 이제부터는 저를 따라와주시기 바랍니다. 뭘 쓸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제자들을 한 번 상상해봅시다. 그들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들 삶에 뛰어든 예수에게 한없는 매료를 느꼈습니다. 그들은 대번에 예수가 주님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섰습니다.

험난한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중에 몇은 여전히 예수에 대한 오해, 그러니까 스승께서 이 부조리한 세상을 부수고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는 새로운 세상을 여실 것이라는 기대들, 로마의 지배를 이기고 순결한 당신 백성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희망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지금 무엇을 지향하고 계시는지, 비록 예수에 대해 매료는 되었다할지라도 예수의 뜻을 헤아리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뜻은 이런 것이었지요.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감히 인간의 계산과 인간의 속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반대를 받으십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인과응보, 상선벌악, 상선필벌을 요구했습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반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같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 같지 않다는 것이었지요. 하느님은 그야말로 무한히 사랑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신데, 사람들은 자꾸만 구별짓고 성별짓고 인간이 생각하는 옳고 그름만으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일에 반대하신다는 것이었지요.

처음에는 예수에게 치유를 받고 위로를 받고 희망을 얻었던 이들도 결국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뒤엎을 계획도, 왕이 될 야심도, 새로운 나라를 세울 반역도 꾀하시지 않자 많은 이들이 떠나갑니다. 예수께서 주시고자 했던 것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체험하고 익혀서 사람들이 새로운 생명, 곧 하느님 나라를 주고자 하심이었으나 사람들은 더 이상 그 나라, 곧 하느님의 사랑을 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많은 이들이 떠나갑니다. 제자들은 그것들을 다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죽도 밥도 안되겠구나, 미리 한 자리라도 차지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죽을 길에 오른 스승, 이제는 죽음으로서만이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과 자비를 드러낼 수 밖에 없음을 받아들인 스승 앞에서 자릿 싸움을 벌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스승은 그런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정말로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고 그들에게 당신의 몸과 피인 빵과 포도주를 들어 마지막 식사요 당신의 제사를 제자들에게 기꺼이 나누어주셨습니다만은 그 때까지도 제자들은 스승이 지금 무엇을 원하시고 어떤 길을 가시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내가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한 시간만이라도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해달라는 스승의 청마저도 그들은 지키지 못합니다. 함께 예수님과 3년이나 동거동락을 하고 한 솥밥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했고 나약했으며 무력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 없이 스승이 체포당하자 함께 죽을 것이라던 제자들 모두는 제 살자고 모두가 스승을 버리고 도망을 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당신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던 으뜸 제자 베드로는 그 한 밤 사이 무려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배신합니다. 그리고는 닭이 세 번 울게 되지요.

오합지졸 오합지졸 이런 오합지졸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예수는 이런 제자, 아니 이런 인간들을 믿고서 당신의 계획 모두를 이들에게 맡기실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무력하고 비겁한 인간 군상들이었습니다.

스승의 죽음은 아무 것도 남겨진 것 없는 실패였습니다. 예수가 죽고 난 이후 그 제자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그 실패와 좌절과 낙담을!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하면 좋을까? 그분은 당신 자신도 구하지 못하셨는데, 어떻게 그런 분이 우리를 보호하실 수 있을까? 그분이 살아 계실 때 스스로를 변호하지도 못하셨는데 죽은 다음 어떻게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실 수 있겠는가? 그분은 살아 계실 때 한 민족도 정복하지 못하셨는데, 죽은 다음에 어떻게 우리가 그분의 이름만 가지고 온 세상을 설복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일을 하려고 하는 것 뿐만 아니랄, 그런 일을 생각하는 것 조차 이성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는가?”(요한 금구) 라고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 정도로 철저히 파괴되고 흔적조차 남지 않은 스승의 삶과 죽음만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금 자기들 삶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나는 다시 물고기나 잡으러 가겠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 중 몇 안되는 이들만 여전히 다락방에 숨었을 따름이었습니다. 신명 없던 곳, 기쁨 없고 희망 없는 시간이 지날 무렵 그들 안에서 전혀 기대하지도 또 예상하지 못한 파동이 일어납니다.

스승께서 죽음으로 끝나지 아니하시고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증언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끝날 줄만 알았던 스승이, 죽음으로 모든 실패로 끝장난 줄 알았던 스승이 부활하시어 우리들 안에 함께 계시다는 증언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사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끝까지, 그리고 무한히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가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완전히 따라 살게 된다면 하느님께서 그 생명을 온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돌려주실 것이라는 예수의 믿음이 구체화된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이 부활이라는 인류가 생성된 이래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하고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조차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두려웠으며 그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와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라 단정지었습니다.

굳게 잠긴 다락방의 방문은 닫힌 채 열릴 줄을 몰랐습니다. 그렇게 50일이 더 지났습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날이었지요. 자기들에게 어떤 변화와 어떤 능력이 주어질지도 모른체 그저 엄마 없는 아이들처럼 웅크리고 있던 그들에게 하느님의 현존, 곧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님을 죽음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금 살려내셨다고! 세상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시고!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렇게 죄 많고 무력하고 하잘 것 없는 우리들에게 다시 살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고! 예수로 인하여 우리는 새로운 생명과 구원의 기회를 얻었으며 그 구원은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성령의 깨달음>이 부어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성령, 곧 하느님의 현존이, 이 죄 많은 우리들을 하느님이 벌하지도 버리지도 않으셨다는 것, 당신 아들 예수의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눈감아주셨고, 이 비겁하고 욕심 많고 겁 많은 우리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우리가 바로 당신 아들 예수를 버린 사람들인데 어떻게 우리를 용서하시고 어떻게 이런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스승 예수의 삶을 떠올리기 시작합니다.

내가 살아있을 때 그토록 가르치고자 했던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고 말이지요. 그 어떤 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한계와 절망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은 너희들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로 인하여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헤아릴 길 없고 인간의 계산으로는 도무지 범접조차 할 수 없는 그 사랑의 현존에 대하여 대단히 강렬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외치지요.

“누가 감히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9)

그렇습니다. 그들이 체험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들을 놀랍게 변화시킵니다. 제자들의 회개가 일어난 것입니다. 회개의 첫 번째 표징은 두려움을 이긴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죄책감을 이겨낸 것이었습니다. 나가면 예수의 제자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한 세상을 향해 그들은 다락방문을 열어젖혔습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굳셈의 은사요,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용덕의 은사요,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믿음의 은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표징이 이어집니다. “당신은 예수와 한 패이지요?”, “아니오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 비겁했던 입술이 담대히 “예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다!”고. “그분은 우리의 죄 모두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신 하느님의 어린양이셨다!”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벌하거나 심판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모두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그러니 “여러분, 다시금 하느님 앞으로 나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예언의 은사요,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용기의 은사요,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통달의 은사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수차례 붙들렸고 매 맞고 투옥 당했습니다. 고린토 후서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나는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적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2고린 11,24-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위험과 협박과 매질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약함을 자랑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모든 것을 무엇을 여겼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이외에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슬기의 은사요,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의덕의 은사요,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망덕의 은사였습니다.

초세기 교회 공동체는 참으로 많은 시련과 문제들이 산적했습니다. 그 안에는 재물을 이용해 성령을 사려는 이들이 있었고, 자신의 재물을 감추고 숨기는 이들이 있었으며, 교회 공동체의 분열을 조장하고 가난한 과부들을 용렬하게 겁박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제자들을 그럴 때마다 지혜를 찾고 성령의 뜻을 구했습니다. 성령의 이름으로 교회를 지켰으며, 성령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정의를 알렸고, 성령의 이름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맹렬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들로 인해 교회 역사상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오로지 초세기 교회만이 믿음과 생활이 완전히 일치되는 교회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의 은사요,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애덕의 은사요,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지식의 은사였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사도들 자신이 무수한 기적의 시혜자들이었습니다. 절름발이를 걷게 하고, 맹인을 보게 했으며 아픈 이들을 치유했고 죽은 이들을 살렸습니다. 믿을 수 없을만큼의 먼 거리를 전교하였으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이들을 구원하였습니다. 사도들을 만난 사람들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온 것처럼, 하느님께서 분명히 저들과 함께 계심을 실토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사도들은 무수한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줄 은이나 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합니다. 일어나 걸어가시오!” 그러자 그 앉은뱅이는 당장에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사도 3,6-8)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치유의 은사요,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기적의 은사였습니다.

이 뿐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의 설교는 수많은 민족 모든 이방민족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의 놀라운 위력이 있었고 그들의 설교를 통해 예수를 박해하고 죽였던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그 자리에서 회개를 다짐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며 수천 명이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현존,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사도들을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예언의 은사요, 성령께서 주시는 심령과 가르침의 은사였습니다. 대단하지요?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그 겁쟁이들이 말이지요, 그 비겁자들이 말이지요, 그 무식쟁이들이 말이지요, 그 도망자들이 말이지요,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무엇이 겁쟁이었던 그들을 겁 없이 만들었고, 무엇도 말하지 못했던 그들을 말하게 만들었으며, 무엇으로부터 도망자였던 그들 모두를 떳떳하고 당당한 순교자로 만들 수 있었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도대체 어떤 힘이?

바로 하느님의 현존 <성령>이었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 놀라운 변화에 대하여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어집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 제자들이 일으켜낸 엄청난 회심과 무아지경의 기적들과, 세상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처참한 실패 이후에 이토록 가공할만큼의 강력한 공동체의 건설을 누군들 도무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성령이십니다. 하느님의 현존이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실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그 성령의 은사를 청하려고 합니다. 아니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청하고자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느님의 현존으로부터 오는 모든 선물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다양한 상황 속에 그리고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에서 오로지 하느님의 현존에만 의탁했던 사도들을 통해서 드러난 무수한 선물들을 우리는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그것을 기록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설명하기 위해서 기록한 책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에 의탁한 사도들에게 어떠한 일들이 발생했는지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을 따르고자 하는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이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과 자비에 전적으로 의탁하고 거기에 매달리는 순간, 우리에게도 지금 우리 자신들 각자의 상황과 고통에 맞는 하느님의 선물들이 주어질리라는 것을 믿고 의탁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느님의 사랑을 청하십시오. 하느님의 현존을 청하시고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회개하는 은총을 청하십시오. 죄가 많고, 약점이 많고, 절망이 많고, 한계가 많은 것, 감히 사도들 앞에 여러분의 약점을 핑계로 회개를 거부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3년을 살아도 도망갔던 사람들입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그들처럼 깨달읍시다. 우리도 그들처럼 다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읍시다.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합시다.

단지 그것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의 그 유력하고 똑똑하고 강력했던 사람들이 세웠던 무수한 제국보다 더 강하고 더 찬란한 이 교회를 오늘까지도 이어오게 만들었습니다. 누가 하였습니까?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지금도 이 자리에 우리를 움직이십니다.

이 죄 많은 사제를 통하여 감히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라고 증언케하십니다. 이 죄 많은 교회가, 냉담자가 넘치고, 교회는 비어가며, 이제는 교회를 모독하고 교회를 비방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이 자본주의 맘몬의 권력에 한 없이 멍들어가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이 교회를 지키고 계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초세기 교회 공동체의 놀라운 변화를 묵상케하고 그 속에서 이루어졌던 성령의 은사들을 간곡히 청하게 하십니다.

누가 이것을 할 수 있습니까? 성령께서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벌써 망했을 교회이고, 벌써 떠나갔던 사제이며, 아예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던 신자들 아닙니까?

우리 안에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하느님은 아주 먼 분에 불과하고,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예수는 과거의 인물에 불과하고,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며,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교회란 한낱 조직에 불과하고,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권위란 허울 좋은 지배에 불과하고,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선교란 선전광고에 불과하고,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전례는 뻔한 희생제사에 불과하고,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가치는 노예의 삶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어집니다.

성령이 지금 이 자리 이 순간에 계시기에 우리들은 살아 있는 복음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시간까지 이어지고 있는 교회를 통해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이 계시기에 가능한 일이요, 성령이 계시기에 벅차고 설레이는 일로 꿈틀거리게 하십니다.

저와 함께 견진 강의 3일을 함께 하신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심을 확실히 믿으십니까? 그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범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단 한 번도 우리의 죄에 걸려 넘어지신 적이 없으셨던 그 사랑, 아버지 등에 칼을 찌르고 떠나간 그 자식 놈이 다시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그 사랑, 그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숨쉬고 이렇게 살아있음을 깨달은 여러분, 우리가 감히 하느님의 사랑을 아주 조금이라도 이제 이해했다고 감히 증언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께서는 우리가 통절히 회개하기를 세상 누구보다도 바라시고 세상 그 어느 존재보다도 우리의 회개를 기뻐하시며, 내가 악과 싸우고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많은 은사들을 이미 꺼내서 준비하고 계심을,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러니 여러분, 부탁드립니다. 회개하십시오. 견진성사 전에 꼭 회개의 고백성사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 하느님의 구원이 우리와 이 땅에 이미 와 있음을 받아들이시고, 무엇보다도 성령께 여러분을 맡기십시오!

그리고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의 영혼을 위하여, 저의 영혼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교회의 영혼을 위하여, 저를 써주십시오. 저의 죄로 인해 더 이상 저의 영혼이 발목 잡히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하느님의 것이라면 그것을 취하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쓰레기와 같은 세상의 것들로부터 시달리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내가 살면 몇 년이나 더 살겠습니까? 나만 천년만년 살 것 처럼, 수십 년 먹을 것을 염려하고, 내 뜻대로 못하는 내 자식 걱정에 밤잠을 설치며, 몸 조금 안 좋은데에는 오만 약을 입에 달고 살면서 어이 갈 길이 낼모랜데 어찌하여 이내 영혼은 하느님 단 한 분만이 내 인생의 참 주인이심을 고백하지 못했는지, 그러고서도 내가 신자랍시고, 어디 가서 얼굴 내민 생각을 하면, 염치없고 님을 뵐 낯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하느님, 저 다시 살고 싶습니다. 저 다시 하느님 자녀로, 하느님 현존, 지금 나와 함께 살아계시는 당신께 기도하고, 당신께 말씀 듣고, 당신이 좋아하시는 일 하며, 오로지 나의 모든 관심사를 당신께로 돌리겠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오소서. 제 마음 문을 활짝 당신께만 열어젖혔사오니, 성령이시여, 저에게 오시어 새로운 관계, 새로운 계약 속으로 저희를 받아들여주소서. 머지 않아 내 인생의 어둔 밤이 찾아왔을 때 내 안에 불타오르고 있는 성령의 불이 저의 영혼과 육신을 하느님 아버지 계신 곳으로 인도하게 하소서. 다시금 성령으로 저의 온 몸을 불사르나이다.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겠나이다. 나의 모든 부정을 씻고 나의 모든 죄와 약점을 벗고 이제 새로운 옷을 입겠나이다.”

견진을 준비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사도 바오로의 갈라디아서 말씀으로 지난 3일동안 견진을 준비한 여러분들을 축복하고자 합니다. 견진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강건한 자녀로 거듭난 여러분들에게 사도 바오로는 분명히 이렇게 축복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견진을 받은 여러분은 이제 모두, 그리스도를 <옷>입듯이 입었습니다.”(갈라 3,27)

새로운 옷을 입을 준비를 잘 갖추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우리도 사도들처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합시다.

아멘!

(마침기도) 성예로니모의 요엘서 주해서에서
“주님은 인자하시고 자비하십니다. 죄인의 죽음보다는 그의 회개를 더 원하십니다. 분노에 더디시고 자비에 넘치십니다. 쉽게 성을 내는 인간을 닮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주님은 악과는 거리가 머시고 악을 괴로워 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주님께서도 당신의 위협을 거두시고 그것을 행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태도 변화에 따라 주님의 마음도 변하십니다. 다만 하느님의 위대한 자비가 우리 게으름의 핑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Warning: mysql_fetch_array(): supplied argument is not a valid MySQL result resource in /home1/namadia/public_html/zboard/view.php on line 266
NAME      PASSWORD
따뜻한 
코멘트 
부탁드려요 
 ▼ 






Prev  <성경의 맥락> 콜로라도 스프링스 한인성당 성경강의
Next  <라이프> 2018. 08 직원 월례미사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u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