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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께서 남기신 글 (2017-12-26 08:34:32, Hit : 384)
<슈테판> 성 스테파노 순교자 축일

<성 스테파노 순교자 기념일>

(INTRO)
모름지기 스승의 길을 따라 걷는 제자라고 한다면, 더욱이나 스승의 임종을 전하는 제자라고 한다면, 그분의 죽음 길 닮아 나도 걸을 수 있는 준비를 갖춤이 지당합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23,34)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죽어갔던 스승처럼,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순교자 또한 사부의 임종과 같은 것을 남기며 순교합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사도 7,60)

죽음의 억울함은 수정불가한 비극이지만, 이 매몰찬 죽음 앞에서도 스승과 제자는 원망과 저주가 아니라 용서를 부르짖으며 떠나갑니다. 유독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이 많은 요즘입니다. 부디 이것들을 이겨내는 힘을 청하며, 스테파노 순교자 기념일 미사를 시작합시다.

(강론)

<슈테판>

10년 넘게 수술실에서 근무하다 지금은 보험 쪽에서 일하고 있는 퇴직 간호사들을 만났습니다. ‘왜 병원을 그만 두었냐?’ 물으니 아픈 사람들 곁에 있는 것이 힘들어서 그랬답니다. 맞습니다. 눈에 보이는 뻔한 고통을 담지하고 있는 이들 곁을 지킨다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 했는데, 가족도 아닌 남을 끝까지 돌본다는 것은 직업을 넘어 놀라운 일이지요.

고통과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뿜어내는 부정과 불안정의 탄식들. 그런 그들이 지닌 인식의 바탕에는 <억울함>이 있습니다. 남들 다 잘 사는데 왜 나만 이렇게 아픈가! 그런 억울한 사람들만 축척되어가는 병원에서 소진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죽음을 앞둔 가족을 만났을 때, 의료사고라고 큰소리치는 보호자들을 만났을 때, 끝까지 살고자 몸부림치는 임종자의 손을 잡아야 할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나를 위해 그런 얼굴을 하지 말아 달라.’고 나에게 부탁했던 ‘슈테판 펠리치코’를 떠올렸습니다. 말기 암환자였던 슈테판은 죽음 그 순간까지 자기의 인생은 참으로 큰 축복이었노라고 기뻐하였고, 그의 한국인 아내조차도 남편의 선종을 선한 얼굴로 돌보고 있었습니다. 성당에서 그를 만날 적마다 그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를 위한다면 절대로 슬픈 표정을 짓지 말아주세요. 그건 아무에게도 도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함께 있고 또 머지않아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다시 만날 것이니 슬퍼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끝까지 견딘다는 것.
원망과 저주와 분노는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처이기는 하나
그것을 한다한들 고통을 피할 재간은 없습니다.
끝까지 견딘다는 것.
억울한 고통 속에 담긴 그 밑바닥을 깨트리는 것은 단 하나의 길입니다.

그것마저도 끌어안는 것이지요.
슈테판이 그랬던 것처럼.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기는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처럼 도리어 웃어주었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랬습니다. 산다는 것은 뭘까? 그리고 신앙한다는 것은 뭘까?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어짜피 죽지 않을 거면 살아야 하고,
기왕지사 살꺼면 어떻게 견딜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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